존셜로 대청소 시키는 존과 억지로 청소하는 셜록.
3인칭으로 쓰다가 1인칭으로 갈아엎은 비화가...ㅠㅠ
계속 쓰다가 밖에 나가고 쓰다가 딴거 하고 그래서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보다 너무 길어.....ㅠㅠ
그래도 쓰면서 즐거웠다. 나도 내방 청소해줄 존이 있었으면 좋겠다ㅎㅎㅎ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반쯤 열린 커튼 사이로 환한 햇살이 비쳐 들어왔다. 커튼을 열어젖히고 창문을 열자 어젯밤에 내린 비가 구름과 매연을 다 씻어갔는지 새파란 물이 뚝뚝 떨어질 만큼 맑은 하늘이 회색 건물 위로 반짝 반짝 빛나고 있었다. 코끝을 스치는 바람은 아직 쌀쌀했지만 따사로운 일광에 잘 마른 봄의 냄새가 옅게 배어있다. 침대 맡에 놓아둔 스마트폰에 따르면 오늘 강수 확률은 5%. 툭하면 부슬부슬 내려서 어깨를 적시기 일쑤인 런던의 축축한 날씨를 감안하면 이례적인 숫자였다. 갑자기 성큼 다가온 봄의 기운을 느끼며 나는 생각했다. 바로 오늘이라고.
거실로 내려가자 소파 위에 삐뚜름하게 웅크린 길쭉한 덩어리가 나를 맞이했다. 그러면 그렇지. 오늘도 여기서 잤군. 나는 발소리를 죽일 노력도 하지 않고 소파로 쿵쿵 다가갔다. 덩어리의 표면을 감싸고 있는 건 감색 체크무늬 양모 담요. 사용한지 10년은 넘었는지 겉이 다 헤져서 보푸라기가 잔뜩 일어난 낡은 담요다. 그 담요 안에 감싸인 것이 무엇인지는 소파 팔걸이 쪽으로 터진 틈새에서 살짝 비어져 나온 까만 털 뭉치 한줌으로 추론이 가능하다. 나는 한숨을 길게 내쉬고서 마치 덩어리의 피부인양 찰싹 달라붙어 있는 담요를 움켜쥐고 홱 잡아당겼다.
“셜록, 일어나!”
양모 담요의 허물을 벗은 셜록은 마치 어머니 태내에 들어있었을 때처럼 웅크린 포즈로 누워있었다. 강제적으로 탈피 당했어도 한번 꿈틀했을 뿐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순 없지. 나는 아침 햇살을 철저하게 차단하고 있던 거실 커튼을 활짝 열어젖혔다. 눈부신 자연의 조명이 굴속처럼 어두웠던 거실로 사정없이 쏟아져 들어오자 소파 위의 커다란 인간 덩어리에게서 진동과 으르렁거림의 중간 단계와 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다시 그에게로 돌아가서 귓가에 대고 외쳤다.
“셜록, 일어나게! 아침이야!”
처음엔 셜록이 내뱉은 말이 무슨 내용인지 제대로 알아듣지 못했다. 그것은 아픈 동물이 앓는 소리 같기도 했고 부두교의 주술을 외는 소리 같기도 했으며 잠이 쏟아지는 오후에 귓구멍으로 느릿느릿 흘러들던 노교수의 교양과목 수업 같기도 했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여보자 웅얼거리던 목소리가 조금씩 명료해지면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가 되었다.
“아침과..............기상의 상관관계는...............사회적인 습관에 길들여.........실업자........내 두뇌는 수면을.............내 담요.............존......................”
다 알아들을 순 없었지만 대충 해석해보자면 ‘아침이 뭐가 대수라고 날 깨우는 거야? 아침에 일어나서 할일도 없는데 날 깨우지 마. 자네도 백수잖아. 난 졸려서 더 자야겠어. 내 담요 돌려줘, 존.’인 것 같다.
“셜록, 잠이 부족한 건 이해하지만 그러게 추리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자두면 좋았잖아. 며칠 밤을 홀랑 새고서 사건이 해결되면 폭면하는 습관은 몸에 안 좋다고.”
그러나 나의 핀잔에도 반쯤 감겨있는 셜록의 눈은 제대로 떠지지 않았다. 내가 허물, 아니 담요를 돌려줄 생각이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셜록은 이번엔 아르마딜로처럼 몸을 동그랗게 말고 다시 소파에 파묻혔다. 잔소리를 퍼부어도 무시의 갑주로 튕겨낼 작정인가보다. 평소라면 나도 사건 해결한 다음날의 나태를 너그럽게 방관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이 황금 같은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나는 팔짱을 끼고서 좀 더 단단해지고 동그래진 셜록 덩어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자네가 멀쩡한 침대 놔두고 왜 여기서 자는지 알고 있어.”
셜록 덩어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남들은 자네가 침실까지 가기 귀찮아서 소파에 쭈그리고 잠들었다고 생각하겠지만 내 추리에 따르면 자넨 피치 못할 이유 때문에 여기 내려와 자는 거야. 내 말이 틀렸나?”
나는 떡밥을 던져놓고 오늘의 고기가 입질하기를 기다렸다. 셜록 앞에서 ‘추리’를 들먹이는 것은 그에게 정면으로 도전한다는 뜻이다. 아니나 다를까 반응이 좀 늦었지만 동그랗게 몸을 말고 두 팔 사이에 고개를 쳐박고 있던 셜록이 천천히 머리를 들었다.
“호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추리한 거지...?”
물었다.
셜록의 미간엔 아직도 불쾌감과 졸음이 묻어있었지만 아까보다 확연하게 명료해진 목소리엔 흥미가 배어있었다. 정확히는 ‘존 자네가 내 앞에서 추리를? 어디 해보시지.’라는 뉘앙스에 더 가까웠지만. 어쨌든 셜록은 내가 던진 떡밥을 물었고 나는 간만의 월척을 놓치지 않을 작정이었다.
“오, 내가 대답하면 자넨 분명 화를 낼 거야. 이렇게 간단한 건 추리라고 부를 수 없다면서.”
“존, 내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어. 짐작 가는 건 있지만 무슨 꿍꿍이속인지 어서 털어 놓는 게 좋을 거야.”
“그럼 내기하겠나?”
나는 별거 아니라는 듯이 승부수를 던졌다.
“내가 자네가 왜 여기서 자는지 맞추면 그 추리가 자네 성에 차건 안 차건 내 요구를 하나 들어주게. 만일 내가 못 맞춘다면 똑같이 자네가 시키는 대로 하겠어. 어때?”
셜록 덩어리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돌돌 만 몸체에서 긴 팔다리를 쑤욱 쑤욱 뽑아냈다. 낡은 가죽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켜 앉은 그는 거만하게 다리를 꼬고 말했다.
“좋아. 어디 한번 해봐.”
잠에 취해 칭얼거리던 탐정님은 이제 완전히 정신이 든 모양이다. 나는 셜록을 흉내 내어 턱 밑에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자네가 침실의 침대를 놔두고 좁은 거실 소파에서 자는 이유는 사실 간단해. 침대에서 잘 수 없기 때문이지.”
“어째서?”
“누울 자리가 없으니까. 자네 침대 위엔 옷장에서 쏟아져 나온 옷과 책꽂이에서 끄집어낸 파일들이 가득 쌓여있어서 침대에서 잘 수 없는 거야. 바닥도 상황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낡은 담요 한 장만 가지고 내려와서 여기서 자고 있는 거지. 내 말이 맞지?”
의기양양하게 셜록을 내려다보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에서 슬쩍 한쪽 눈썹만 치켜 올렸다.
“흥미롭군.”
“그게 다야?”
“내기까지 걸 정도면 논거에 상당한 자신이 있다는 얘긴데 내기 조건에 ‘내 성에 차건 안 차건’이 붙는 걸 보아 내가 만족하지 못할 걸 알고 있다는 뜻이로군. 그렇다면 추리의 과정을 거치지 않은 직관이거나 커닝을 했다는 건데 자넨 내 방에 멋대로 들어가는 사람이 아니지. 허드슨 부인에게 들었나?”
“아니, 허드슨 부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어. 다만 자네 방으로 올라갔던 부인이 빈손으로 내려오는 건 보았지. 하지만 내가 결론을 내린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추리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르기 전에 나는 짐짓 뜸을 들였다. 넌 모르지만 난 알고 있다는 유치한 우월감이 얼마나 달콤한지 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셜록은 이런 기분을 매일 맛보고 있겠지. 나는 셜록의 눈에 다시 졸음이나 지루함이 떠오르기 전에 비장의 무기를 꺼내보였다.
“해리.”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들은 셜록의 눈에 순수한 의문이 떠올랐다. 셜록을 놀래키는 것은 아주 힘들고 드문 일이지만 성공했을 땐 언제나 기분이 좋다. 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그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십대 시절에 해리가 옷정리를 하다가 수습을 못하고 종종 마루에 나와 잤어. 자네가 어제 양말을 짝짝이로 신은 걸 보고 확신했지. 침대 위에 옷가지를 쌓아놓고 정리를 못해서 거실로 나와서 자는 거라고.”
“흠, 자기경험에 따른 성급한 일반화. 확실히 내가 좋아할 만한 추리는 아니로군.”
말은 그렇게 해도 나는 셜록이 이 추리에 꽤 흥미를 느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 해리의 성별을 틀린 이후로 셜록은 나의 레즈비언 누나에 대한 화제가 나오면 다시는 실수하지 않으려는 듯 귀를 쫑긋 세우고 경청했다. 남자형제만 가진 그에게 여자형제 + 레즈비언의 조합은 낯설고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신경 쓰고 있던 해리와의 경험담을 자신의 영역인 추리로 가져가서 당당하게 도전했으니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겠지. 그걸 노린 얄팍한 한수였지만.
“그래도 틀리진 않았지?”
“흠.”
셜록은 YES도 NO도 아닌 콧소리로 미묘한 심사를 표현했다. 성에 차지 않는 단순한 연역과정을 인정하기 싫은 마음과 언제나 듣기만 했던 동거인이 자신을 흉내 내서 추리영역에 발을 들여놓았다는 달가움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여기서 성급하게 굴면 이 변덕스런 친구는 미끼에 흥미를 잃고 사뿐사뿐 달아나버릴 것이다. 그렇게 둘 수야 없지. 나는 참을성 많은 군견처럼 버티고 서서 셜록의 대답을 기다렸다. 흘깃 내 얼굴을 올려다본 셜록은 물러설 기색이 없자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마음에 들진 않지만 내기는 내기니까 어쩔 수 없지. 그래서 내게 뭘 시키고 싶으신가, 왓슨 탐정님?”
갈등의 저울은 결국 귀찮음 쪽으로 기울어진 모양이다. 마침내 원하는 대답을 얻어낸 나는 절로 웃음이 나오려는 걸 애써 참았다. 오, 자넨 분명 내 대답을 싫어할 거야.
“셜록, 오늘은 자네 방을 청소해야겠어.”
옷장과 서랍장이 단체로 거식증 환자가 되어 침대 위에 토해낸 광경이 이럴까. 아니면 베이커가 221B에만 국지적 지진이 일어나서 책꽂이 안의 책이 모두 바닥으로 투신한 것인지도 모른다. 등교거부 아동처럼 뒷걸음질 치며 버티는 셜록을 억지로 끌고 침실로 올라온 나는 방안의 참상을 보고 말을 잃고 말았다. 어질러진 해리의 방을 보고 자랐고 남자들만 득시글한 군대 막사에서 생활했던 나로서도 처음 보는 형태의 카오스였다.
“...가진 옷들이 마음에 안 들기라도 했나?”
문가에 소금기둥이 되어 서 있다가 겨우 입을 연 나에게 셜록은 입을 비죽 내밀며 대꾸했다.
“보이는 것과는 달리 내 방의 물건 배치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많이 쓰는 물건은 손 뻗으면 잡히는 곳에 놓여있고 자주 안 쓰는 물건은 자주 쓰는 물건 아래 있을 뿐이야. 지금은 옛 자료를 찾느라 수납체계가 다소 어지러워지긴 했지만 굳이 청소를 할 필요까진 없다고.”
“하지만 셜록! 자네 침대에 코트가 대신 누워서 자고 있잖아!”
말 그대로 셜록의 튼튼해 보이는 싱글베드엔 그가 즐겨 입는 검은 코트가 매우 편안한 자세로 누워있었다. 코트의 등 밑에는 셜록이 자주 입는 수트와 셔츠, 머플러 등이 역시 편안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사용 빈도에 의한’ 수납체계라면 그의 방은 상당히 잘 관리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방에 문제가 있다면 평균적인 위생관념과 정돈개념을 가진 사람에게 참을 수 없는 정리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 그런데 대체 어디부터 손대야한단 말인가. 황망히 방안을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방바닥에 떨어져 있던 흰 셔츠가 들어왔다.
“이건 왜 바닥에 있는 건가? 자주 안 입는 셔츠야?”
“그건 드라이클리닝 보낼 거야.”
“드라이클리닝?”
나는 셔츠를 주워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패션에 대해 잘 모르는 내가 봐도 비싸 보이는 셔츠는 칼라 안쪽도 노랗게 물들지 않고 소매 끝도 더럽지 않았으며 가슴에 어떠한 얼룩도 묻어있지 않았다. 내가 셔츠를 든 채로 의아한 시선을 던지자 셜록은 태연하게 셔츠의 팔꿈치 부분을 가리켰다.
“구겨졌잖아.”
그 말을 듣고 보니 팔꿈치 안쪽에 미세한 주름이 몇 줄 접혀있는 것이 보였다. 그래, 옷 주름. 큰 문제지. 사람이 어떻게 팔꿈치 안쪽이 구겨진 옷을 입고 집밖에 나갈 수 있겠어? 팔에 관절이 있고 관절을 안으로 접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구겨지는 부분에 굳이 찾아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 주름이 생긴 옷은 드라이클리닝을 보내야 마땅할.............리가 있겠냐!!! 이 경제관념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부잣집 도련님 같으니라고! 나는 당혹스러운 눈으로 셜록의 방바닥을 둘러보았다. 발 디딜 틈도 없이 바닥 여기저기서 참호를 쌓고 있는 옷가지들은 모두 조금 구겨졌거나 살짝 먼지가 묻은 몸을 부끄러워하며 세탁소로의 강제이송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머리가 아파왔다.
“셜록......, 혹시 스팀 다리미와 브러시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나?”
그러자 셜록은 전에 ‘여자 친구는 있어?’ 하고 물어봤을 때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다. Not my area. 그렇겠지. 태양계도 머릿속 하드 드라이브에서 지워버리는 셜록 홈즈께서 다리미와 브러시가 바이트 낭비를 하도록 내버려둘 리가 없었겠지. 이렇게 말하는 나 자신도 셜록이 손수 다림질을 하고 옷에 묻은 먼지를 터는 장면을 상상하기가 어려웠다.
“그럼 적어도 물빨래가 가능한 옷과 드라이클리닝만 해야 하는 옷은 구분을......”
한숨을 쉬며 셔츠의 태그에서 세탁 주의사항을 읽던 나는 그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Dry cleaning only
“Oh, God........”
내가 다시 소금기둥으로 화한 것을 보고 셜록이 히죽 웃었다.
“내 방의 정리 체계에 대해 납득했다면 이만 밑으로 내려가세. 난 아직도 5시간 이상의 수면이 필요해. 대신 자네가 원한다면 자기 전에 아침식사 정도는 같이 먹어줄 수 있어. 난 반숙보다 완숙이......”
그러나 나는 참고 있던 하품을 하며 나를 슬슬 아래층으로 데려가려고 하는 셜록의 어깨를 두 손으로 덥석 잡았다.
“납득? 납득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셜록 홈즈, 오늘 이 방을 야간 점호 직전의 신병막사처럼 청소하지 않는다면 다섯 시간의 단잠도 완숙 계란도 없을 줄 알게! 오늘 날씨가 얼마나 좋은지 알아?! 비싼 옷들이라 못 빤다면 저놈의 침대 시트와 베개 커버라도 빨아야겠어!”
변명은 아니지만 나는 깔끔 떠는 부류의 남자가 아니다. 독신남이자 군의관으로 지내면서 더러운 꼴은 볼만큼 봤고 전장에서는 일주일 넘게 씻지 못한 적도 허다했다. 문손잡이에 세균이 득시글거린다고, 그리고 그게 사실이긴 하지만 문 열 때마다 살균세정제로 손을 뽀독뽀독 씻는 부류는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셜록과 함께 살게 되면서 상식은 물론이고 내가 지금까지 가져왔던 모든 관념들을 뛰어넘는 일들과 조우하게 되었다. 선반에 모셔져있는 해골이나 냉장고 속의 머리, 뭐가 묻어있는지 알 수 없는 실험 도구가 점령한 식탁 등등. 그 모든 일을 겪으면서 나는 한 가지 절실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사람은 치우고 살아야 한다고.
우선 창문부터 열고 의류의 지층 아래 잠들어 있던 침대 시트와 베개 커버를 벗겨냈다. 빨 수 있는 천은 모조리 세탁기에 넣고 돌릴 작정이었다. 물빨래가 가능한 서민계층의 옷들을 색출하는 과정에서 침대 아래 둥지를 틀고 있던 속옷과 양말 더미가 발견되었다. 이것도 드라이클리닝 보낼 거냐고 했더니 셜록은 드물게 시선을 피하며 괜한 커튼을 열었다 닫았다 했다. 시트와 커버와 옷가지들을 세탁기에 쳐넣고 다시 돌아왔을 때, 셜록이 슬금슬금 거실로 탈출을 시도하고 있었다. 나는 세탁기에 빨래를 쳐넣듯이 셜록을 침실로 쳐넣고 청소가 끝날 때까지 외출금지령을 내렸다.
시트를 벗겨내는 과정에서 침대 위의 지층은 지각대변동이 일어나 있었다. 나는 모든 옷을 한데 모아서 드라이를 보낼 옷과 가볍게 손질해서 몇 번 더 입을 옷을 분류했다. 처음에 셜록에게 알아서 골라내라고 맡겼더니 셔츠를 색상과 디자인, 면의 재배지와 제조국가별로 분류하고 앉았다. 결국 그에겐 내가 손질한 옷을 옷걸이에 거는 단순 노동이 맡겨졌다. 셜록 홈즈가 단순 노동이라니. 하, 이건 꼭 블로그에 써야겠다. 요즘 부쩍 늘어난 뉴 스코틀랜드 야드 리퍼러 여러분들이 분명 기뻐할 것이다.
“응, 이게 뭐지?”
조금씩 정리되어가는 셜록의 옷장 깊숙한 곳에서 오래된 알루미늄 상자가 나왔다. 툴툴거리며 느릿느릿 옷걸이에 옷을 걸고 있던 셜록은 박스를 흘깃 내려다보았다. 나는 상자를 꺼내서 점차 지표면이 드러나기 시작한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어린 시절 선물로 들어왔던 커다란 쿠키상자처럼 생겼다. 해리는 그 안에 비밀 일기를, 나는 십대 중반부터 야한 잡지를 숨기곤 했다. 그렇다면 과연 셜록은 이 상자 안에 무엇을 숨겼을까? 나는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양해를 구했다.
“열어봐도 되나?”
“마음대로.”
질색을 하며 싫어할 줄 알았더니 의외로 선선히 허락해주어서 살짝 김이 샜다. 낡아서 겉에 그려진 그림이 무엇인지도 알아볼 수 없는 알루미늄 상자의 뚜껑을 열자 노랗게 바랜 편지봉투 무더기와 조그맣게 포장된 꾸러미들이 나왔다.
“편지를 모아둔 건가? 이건 아이 글씨로군. 보낸 사람이 제이니......”
“협박장이야.”
지루한 와중에 마침 잘 됐다는 듯이 내 곁에 다가와서 털썩 주저앉은 셜록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11살 때부터 받은 협박장이야. 증거로 다 모아두었지. 만일 내가 나중에 살해되거나 납치당하면 이 상자 안의 협박장들을 조사해주길 바라네.”
“어...? 하지만 이건......”
내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셜록이 내 손가락 사이에서 빛바랜 연갈색 하트가 그려진 낡은 봉투를 낚아채갔다.
“어린 소녀부터 중년 남자에 이르기까지 집착이 사람을 얼마나 집요하게 만드는지 알고 있나? 이 협박장을 보게.”
귀여운 봉투 안에서 동물 모양으로 오려진 종이를 꺼낸 셜록은 목소리를 가다듬고 읽기 시작했다.
“Dear Sherlock. 오늘 네가 교내 식당에서 점심을 먹는 걸 봤어. 오이 샌드위치랑 사과주스를 마시더라. 저번에도 사과주스를 마시는 걸 봤는데 넌 사과를 좋아하니? 나도 사과를 좋아해. 너랑 같이 사과주스를 마시고 싶어. 내일 학교 끝나고 후문에 있는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기다릴게. 거기라면 사람이 없어서 눈에 띄지 않을 거야. 꼭 나와 주면 좋겠다. 너랑 영어수업을 같이 듣는 제이니가.”
어리고 귀여운 소녀의 문장을 셜록의 나른한 저음으로 들으니 기괴한 기분이 들었다. 나이트캡을 쓰고 침대에 누워서 할머니인 척하는 늑대의 목소리가 이런 것일까. 셜록의 목소리는 듣기 좋았지만 저 짧은 편지의 문맥에 들어있는 설레임을 하나도 살리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읽어서 더 기괴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협박장엔 낭독한 셜록의 연기력보다 더 큰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건 협박장이 아니라 연애편지잖아!
“문장이 졸렬하고 철자와 시제가 틀려있지만 이 안에 담긴 메시지는 분명해. 난 네가 어디서 점심을 먹는지 알고 있다. 즐겨먹는 메뉴가 무엇인지도 알고 있다. 사람은 습관과 기호의 동물이지. 그 사람의 생활패턴과 기호를 알면 행동반경은 대부분 예측이 가능해. 봐, 자신이 날 파악하고 있다는 걸 드러내면서 대담하게도 날 불러내고 있잖아. 그것도 인적이 드문 학교 후문으로. 도대체 이 여자아이가 내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는지는 어린 나로선 파악하기 힘들더군. 마지막에 나오지 않으면 영어시간에 해코지를 하겠다고 협박까지 하다니. 이런 당돌한 협박장은 본적이 없어.”
“그, 그래서 아이스크림 가게엔 갔어? 그 소녀가 와달라는 대로?”
“나갔지. 가서 날 납치해도 금전적인 이득은 얻지 못할 것이고 난 절대로 너의 협박에 굴하지 않을 테니 네 음모는 부질없었다고 말해주었지. 덤으로 철자와 시제가 틀린 것도 지적해줬어.”
“맙소사, 셜록. 그래서 그 소녀가 뭐라고 했어?”
“자기 잘못을 뉘우치며 울더군.”
“아..........아아..........”
가여운 제이니. 분명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되어서 오랫동안 연애편지는 쓰지 못했으리라.
내가 이 20년에 걸친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하나, 풀 수는 있는 건가 고민하는 동안 셜록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난 경찰에도 알리지 않고 관대하게 처리해줬는데도 그 이후로 그 여자아이와 일부 여학생들이 날 피해 다녔어. 그 뒤로 한동안은 협박장이 오지 않더군.”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 곁에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편지를 들여다보고 있는 셜록의 옆얼굴엔 그의 옷에 묻은 먼지처럼 아주아주 엷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소녀의 연심을 이해하지 못했던 소년. 첫사랑이 담긴 연애편지를 협박장으로 읽은 아이. 어린 시절부터 그가 세상을 보는 방식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듯이, 그 역시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이 사랑을 하고 연애를 하고 실연을 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자연스러운 순환을 이해하지 못했으리라. 누군가 그 소년에게 가르쳐줬으면 좋았으련만. 그 소녀는 널 좋아한 거야...라고.
“외롭진 않았나?”
“질문의 의도를 모르겠어.”
“그 소녀와의 일화를 들어도 그렇고 지난번 세바스찬이라는 친구를 봐도 그렇고, 자네에겐 이것저것 참견하고 자네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어줄만한 친구가 별로 없었던 것 같아서. 어린 시절에 쓸쓸하지 않았냐는 뜻이야.”
셜록은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깜빡였다. 그리곤 투명하게 빛나는 아쿠아마린빛 눈동자를 내게 향하며 말했다.
“가져보지 못한 것에 상실감을 느끼진 않았어.”
“그러면 지금은? 많지는 않아도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있지 않나. 친구라고 하긴 뭐하지만 허드슨 부인이라든가 레스트레이드 경감님이라든가.”
“그리고 자네도 있지.”
“엉?”
바보 같은 목소리가 반사적으로 튀어나왔다. 셜록은 눈꼬리에 살짝 주름을 잡더니 제이니의 연애편지를 고이 봉투에 넣어서 상자 안에 집어넣었다.
“이 대답을 원하는 거라면 존, 나는 지금 외롭지 않아. 외롭기는커녕 아주 성가시다네. 모처럼 육체와 정신을 동시에 휴식하기로 결정한 날에 굳이 방을 청소하자고 잔소리를 해대는 친절한 동거인 덕분에 말이지. Thank you, John.”
“뭐라고? 내가 청소하자고 닦달하지 않았다면 자넨 짝짝이 양말은 기본이고 당장 내일 갈아입을 속옷이 없어서 노팬티로 돌아다녀야 했을 거야. 자네의 아르마니 언더웨어가 아무리 명품이라도 드라이클리닝은 받아주지 않는다고.”
“내 속옷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군, 존. 아르마니 언더웨어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나?”
“뭐? 나는 그게....셜록!”
내 당황한 얼굴이 재미있는지 셜록은 어깨를 흔들며 키득키득 웃었다. 교묘하게 화제를 바꿔버린 건 얄미웠지만 나는 그의 얼굴에 방금 전까지 묻어있던 그림자가 웃음에 씻겨 사라진 것이 좋았다. 그는 여전히 지나치게 똑똑한 만큼 지나치게 둔감한 남자였지만 적어도 그가 연애편지를 받았을 때 그 사람이 널 좋아한다고 말해줄 친구가 곁에 있지 않은가.
...물론 ‘질투’라는 감정이 개입하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청소따위 빨랑 끝내버리자고. 다 끝내고 나면 쾌적한 침대에서 다섯 시간이고 여섯 시간이고 자게 해줄 테니까.”
다시 청소로 돌아가자는 말에 쿡쿡 웃고 있던 셜록의 미간이 대번에 구겨졌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미적거리는 그의 팔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건조기가 다 돌아갔을 때,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방청소도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엉망으로 쏟아져 나와 있던 옷들은 대부분은 정리되어 들어가야 할 곳에 수납되었고 두더지처럼 파내고 방치해둔 책과 자료들도 제 자리로 돌아갔다. 청소기를 돌리고 아직 따끈따끈한 온기가 남아있는 고급 면수의 순면 침대시트를 셜록과 둘이서 쫙쫙 잡아당겨가며 매트리스에 씌워놓자, 폭탄 맞은 도서관과 창고세일 중인 옷가게의 중간단계 같았던 방이 이제야 좀 사람 사는 곳처럼 보였다.
“봐, 셜록. 이렇게 깨끗한 방에서 자면 아주 잠이 잘 올 것 같지 않나?”
“난 어디서든 잘 자, 존. 소파에서도 숙면을 취하는 걸 보면 모르나.”
“그래도 두 다리 쭉 뻗고 자는 자기 침대랑 같겠어? 아아, 한바탕 몸을 움직였더니 목이 마르군. 아직 좀 이르지만, 맥주 어때?”
“좋지.”
냉장고에서 차갑게 식은 맥주캔을 꺼내서 돌아왔을 때, 활짝 열어둔 창문 사이로 비쳐 들어온 늦은 오후의 햇살이 방안을 따스하게 채우고 있었다. 묵직한 마호가니 가구들은 세월의 연륜이 더 짙어지고 갓 마른 하얀 시트는 향기로운 홍차빛으로 물들었다. 나는 조용히 맥주캔을 탁자에 내려놓고 흔들리지 않도록 침대 끄트머리에 가만히 체중을 실었다. 셜록의 검은 곱슬머리가 반듯한 이마에서 스르르 흘러내렸다.
“맥주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
막 씌워놓은 따뜻한 시트 위에 셜록이 동그랗게 똬리를 틀고 잠들어 있었다. 청소를 하자고 소파에서 억지로 끌어낸 것이 오전, 지금은 해가 지기 직전인 오후. 며칠 밤을 홀랑 새고서 몇 시간 못잔 사람치곤 오래 버텼다. 내가 나갈 때까지 억지로 버티고 있다가 발소리가 계단을 내려가자마자 기절하듯 시트 위로 다이빙했을 셜록을 생각하니 슬며시 웃음이 배어나왔다.
“수고했네, 셜록.”
나는 손을 뻗어서 그의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깨끗한 시트에선 은은한 꽃향기와 갓 구운 빵 냄새가 났다. 그리고 셜록에게선, 셜록의 냄새가 났다. 나는 좀 더 몸을 기울여서 셜록이 누워있는 침대 중앙으로 나아갔다. 이마를 쓰다듬는 손길에 셜록은 희미하게 눈썹을 찌푸렸다가 곧 평안한 잠의 나락으로 가라앉았다. 그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으니 나도 스르르 잠이 밀려 왔다.
“일어나면 완숙 계란을 만들어 줄게.”
2인분을 만들어서 때를 놓쳐버린 저녁을 대신해야겠다. 지금 자면 새벽에 깰 것이 분명하니까.
나는 옆으로 누워서 태아처럼 몸을 굽히고 있는 셜록의 뒤로 들어가 그의 허리 밑으로 팔을 넣었다. 얇은 실내복만 걸친 그의 몸은 내가 뒤에서 끌어안자 몇 번 뒤척이다가 가장 편한 자세로 내 품속에 얌전히 안겨왔다. 늘 그러하듯이. 나는 그의 등에 가슴을 밀착시키고 하얀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익숙한 셜록의 냄새가 폐 속 가득 퍼졌다.
“Sweet dream...”
셜록의 동그란 목뼈에 살짝 입을 맞춘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눈꺼풀 위로 내려앉은 햇살이 서서히 짙어지고 있었다.
아아, 좋은 하루였다.
ps.
“셜록, 이 협박장 상자 속에 이상한 물건이 들어있어...”
“그건 콜드 케이스야. 미결 증거 자료.”
“이건 아무리 봐도 남성용 T팬티인데?”
“2005년 한정품으로 나온 비비안 웨스트우드 언더웨어야. 화려한 스팽글과 대담한 끈 디자인이 포인트지. 거기에 맞춤 장식을 추가한 것으로 보이더군.”
“엉덩이 부분에 보라색 큐빅으로 Hello sexy라고 쓰여 있는데???”
“그러니까 나도 그 부분을 아직 모르겠단 말이야. 저 언더웨어가 협박장이란 건 알겠는데 저 문구가 뭘 의미하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오지 않아. 속옷을 스캔해 봤지만 사용한 흔적은 있어도 DNA는 채집할 수 없었고......”
“............셜록. 또 이런 게 오면 버려. 반드시.”
훈훈한 글인데 속옷드립이 왤케 많아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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