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일명은 아무렇게나 지어서 우렁각시 레레....Aㅏ........;
시작은 콘돔이었다.
셜록의 침대 옆 첫 번째 서랍에서 자연 발생하듯 솟아나왔던 콘돔이 똑 떨어진 날, 레스트레이드는 그동안 셜록과 금전적인 쉐어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의 관계는 우연의 산물이었고 비정기적으로 끊어질듯 간간히 이어져 왔기에 레스트레이드는 이 관계가 어떤 것인지 쉽게 이름붙이기 힘들었다. 만일 셜록이 자신의 연인이었다면 데이트 비용은 모두 자신이 부담했을 것이다.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면에선 구식남자였고 일방적인 지출에 대해서 타협할 의향이 조금도 없었다. 만일 셜록이 만나서 잠만 자는 섹스파트너였다면 섹스에 드는 비용을 분담했을 것이다. 호텔비, 룸서비스, 레스트레이드가 사용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도구들, 그리고 콘돔. 목적을 가진 관계는 금전적으로 동등해야 더 오래갈 수 있었다. 그것은 몇 년 전 그리 깔끔치 못했던 이혼 재산분할 소송으로 얻은 지혜였다.
하지만 셜록과의 관계는 그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연인은 처음부터 논외였고 섹스파트너라고 툭 털어버리기엔 공적으로 지나치게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섹스를 하자고 만났다가 미결 사건에 대한 논의로 밤을 새버리고서 섹스보다도 더한 피로감을 느끼며 돌아간 적도 있고, 사건을 해결한 직후 애송이 틴에이저처럼 싸구려 모텔로 급히 뛰어든 적도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사건에서 파생된 관계였다. 사건이 주, 섹스는 부록. 첫사랑에서 이혼까지 산전수전 다 겪어본 레스트레이드였지만 함께 사건을 해결하면서 기분에 따라 몸도 섞는 관계에서 금전적으로 얼마나 부담해야하는지는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나 아마도 귀찮아서 박스로 쟁여놨을 콘돔이 떨어지고 셜록이 인상을 찌푸리며 ‘다 썼군. 오늘은 그만할까.’하고 비에 젖은 장작에서 불똥이 사그라지는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을 때, 레스트레이드는 기대에 들떠있던 장전된 주니어와 함께 청천벽력 같은 낭패감과 깊은 후회를 느꼈다. Oh, God! 진작 좀 사다둘 것을!
레스트레이드가 셜록의 집에 드나들면서 셜록의 물건들(특히 소모품)에 주의를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계기가 되었던 콘돔은 셜록이 사다두었던 것과 같은 상표로 두어개씩 서랍에 넣어두었다. 아무리 레스트레이드라도 셜록에게 대놓고 ‘지난번과 같은 불상사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콘돔 재고 현황을 체크하고 싶네. 일단 이건 오늘 쓸 것과 여분, 그리고 비축분일세.’라면서 콘돔 덕용 포장을 안겨줄 뻔뻔함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셜록이 눈치 채지 못하게 몰래 두어개씩 채워놓고 사용하면 다시 채워놓았다. 셜록이 추리가 아닌 일상에는 무심한 성격이라서 다행이었다.
다음에 눈에 들어온 것은 침대 머리맡의 티슈였다. 마지막 한 장만 간당간당하게 남은 티슈상자를 발견한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이 몸에 묻은 액체를 닦아내려다가 티슈가 떨어진 것을 보고 인상을 찌푸리며 ‘다 썼군. 오늘은 이걸로 끝내지.’하는 것을 떠올리고서 불안에 떨었다. 다행히 그날은 셜록이 욕실로 직행해서 티슈를 쓸 일이 없었지만 레스트레이드는 당장 마트로 달려가서 같은 상표 같은 향기의 티슈를 사서 바꿔치기했다. 물론 완벽을 기하기 위해 처음 몇 장을 한 움큼 뽑아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다음부터는 온갖 물건이 다 신경 쓰였다. 셜록이 뉴스를 보려다가 티비 리모컨이 말을 듣지 않자 ‘배터리가 다 떨어졌군. 오늘은 레스트레이드와 자지 말까.’ 혹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으려다 마요네즈 튜브가 텅 빈 것을 보고 ‘샌드위치를 못 먹겠군. 레스트레이드와 자지 말아야지.’ 혹은 구두약이 다 떨어졌을 때 ‘더 이상 내 구두에서 광이 나지 않아. 레스트레이드와 자지 말아야겠어.’하는 상상이 떠오를 때마다 셜록의 집에는 새 물건이 늘어났고 생활이 점점 윤택해졌다.
스스로도 나잇값도 못한다며 혀를 차긴 했지만 셜록이 모르도록 꾸며두는 것은 은근히 재미있었다. 새로 뜯은 비누는 적당히 문질러서 로고를 지워두었고 새 치약은 가운데 배를 꾹 눌러서 짜냈다. 설탕 봉지는 찬장 뒤에 숨겨두고 병에는 반만 채워두었다. 셜록이 자주 쓰는 영역인 책상 위가 가장 까다로운 스폿이었다. 그러나 레스트레이드는 현장 감식에 익숙한 런던의 민완 경감이었다. 테이블 사진을 찍어두었다가 다 쓴 펜이 놓여있던 자리 그대로 바꿔치기하고 인쇄용지가 부족하다는 경고음을 울리기 전에 부지런히 종이를 보태두었다. 레스트레이드의 치밀한 현장조작은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었고 셜록은 책상작업이 묘하게 쾌적해진 것에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솔직히 셜록의 거처가 자신의 색깔로 물들어가는 것도 그리 나쁜 기분이 아니었다. 그의 집에서 아침을 맞이했을 때 주방에서 좋아하는 커피 브랜드의 향기가 흘러나온다든가, 셜록의 머리칼에서 자신의 것과 똑같은 샴푸 냄새가 난다든가, 샤워를 마치고 나와서 냉장고 문을 열었을 때 즐겨 마시는 맥주가 차갑게 식은 채로 기다리고 있으면 소소한 기쁨이 느껴졌다. (물론 가끔씩 인체의 일부분이 그 옆자리에 놓여있을 때도 있었지만) 평소에 제대로 챙겨먹지 않는 셜록이 좀 말랐다 싶을 땐 쉽게 꺼내먹을 수 있는 음식을 냉장고에 넣어두었고 다음에 왔을 때 그게 없어져있거나 줄어있으면 괜스레 뿌듯했다.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변화에 반응하는 셜록을 보는 것 또한 즐거웠다. 야드의 구정물 같은 커피와 비슷한 맛이 나던 자기 집 커피에서 블루마운틴의 우아한 초콜릿맛이 느껴지자 셜록은 눈을 깜빡이며 머그컵 안의 검은 액체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레스트레이드, 이 커피 자네가 끓였나?”
“응, 별론가?”
“…아니, 나쁘지 않군.”
살짝 입맛을 다시면서 천천히 커피를 맛보는 셜록을 보고 레스트레이드는 속으로 몰래 웃었다. 그 후로 셜록은 집에서 차보다 커피를 더 자주 마시게 되었다.
그렇게 몇 주가 지나자 레스트레이드는 셜록보다 셜록의 물건들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귀중한 사건 파일을 보관하는 곳부터 가게에서 받아온 영수증을 쑤셔 박는 서랍 위치, 즐겨 쓰는 머그컵을 넣는 곳이 몇 번째 찬장인지, 아무렇게나 늘어놓는 것 같은 실험도구들의 정리 체계까지도. 가끔 레스트레이드가 셜록의 집에 들렀을 때, 셜록의 물건들이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으면 슬며시 제 자리에 정리해주곤 했다. 레스트레이드가 다녀갈 때마다 셜록의 작은 플랫은 점점 깨끗해지고 정돈되었다. 그렇게 되자 아무리 일상에 무심한 셜록이라도 뭔가 이상하다는 건 인지한 모양이었다.
“요즘 장보러 가는 빈도가 현저히 줄어들었어.”
아무 맥락도 없이 불쑥 튀어나온 말에 레스트레이드는 찔끔 놀랐다. 들켰나? 하지만 셜록의 얼굴을 훔쳐봐도 나른한 표정만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잘된 일이 아닌가. 장보기 같은 귀찮은 일에 시간을 낭비하기 싫다면서.”
“난 청소한 적이 없는데 집안도 깨끗해지고.”
“자네가 집에 별로 안 있다 보니 그런 거겠지.”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해주자 셜록은 물끄러미 레스트레이드를 응시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르겠군. 그나저나 자넨 요즘 내 집에 자주 오는군. 자넨 집이 없나?”
톡 쏘는 셜록의 말을 대충 둘러대면서 레스트레이드는 휴우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레스트레이드의 비밀스러운 살림 원조와 은폐공작이 종말을 고한 것은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모처럼의 휴일에 늦게 일어나서 느긋하게 화장실에서 신문을 읽고 있던 레스트레이드는 화장실 휴지가 다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휴지뿐만이 아니었다. 치약이 떨어져서 이를 닦을 수 없었고 샴푸가 떨어져서 발톱만큼 남은 비누로 머리를 감아야했다. 설탕통이 텅 비어서 커피에 넣을 수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즐겨 마시는 블루마운틴도 찌꺼기만 바닥에 조금 남아서 빈곤의 향기를 솔솔 풍기고 있었다. 심지어 현관의 형광등까지 나가서 깜빡거렸다. 그동안 셜록의 살림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자기 집의 모든 소모품이 바닥난 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레스트레이드의 폭주는 식비와 기름 값을 제외한 평소 생활비의 두 배에 달하는 카드 청구서가 냉엄하게 증명해주었다. 몇 달간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황폐해진 자기 집을 둘러보며 레스트레이드는 넋 나간 부랑자처럼 망연히 서있었다.
시작은 분명히 작은 콘돔 한 곽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세간에 자신의 월급을 모두 쏟아 붓고 있었다. 심지어 셜록 본인에게 들키지 않도록 안간힘을 써가며!
“하하, 이게 무슨 짓이람….”
먼지가 얇게 깔린 거실 한가운데에 서서 마른 웃음을 터뜨린 레스트레이드는 다용도실에서 진공청소기를 들고 왔다. 그리고 오랜만에 집안 대청소를 시작했다.
그날 이후로 레스트레이드가 셜록의 살림을 은밀히 체크하고 보태는 일은 없어지게 되었다. 물건이 제 자리에 놓여있지 않아도 정리하는 것을 삼갔다. 치약이 떨어지고 휴지가 떨어져도 꾹 참고 채워놓지 않았다. 셜록은 쾌적하던 생활이 전처럼 돌아가자 한동안 짜증을 냈지만 곧 잊어버렸다. 레스트레이드는 셜록의 커피가 다시 구정물 맛으로 돌아간 것이 가장 아쉬웠으나 자신도 더 이상 집착하지 않기로 했다. 셜록의 삶과 레스트레이드의 삶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딱 하나 달라진 것을 제외하고.
“응? 이게 뭔가?”
“콘돔일세. 언제나 자네에게 신세지기 미안해서.”
레스트레이드가 내미는 콘돔곽은 셜록이 사다두었던 것과 다른 상표였다. 셜록은 낯선 종이곽을 들여다보더니 침대 서랍에 휙 던져 넣으며 말했다.
“굳이 안 사와도 되네. 전에 잔뜩 사다놔서 아직도 많아.”
그러자 레스트레이드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오, 내기해도 좋아, 셜록. 내가 장담하건데 금방 떨어질걸.”
존의 전화를 받았을 때, 레스트레이드는 그런 추억을 떠올리고 있었다.
“경감님? 찾는다고 찾아봤는데 셜록이 두고 간 파일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요. 방이 하도 엉망이라서요. 지금 꼭 필요한 물건인가요?”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존의 난처한 목소리를 듣고 레스트레이드는 자상하게 말해주었다.
“지난 사건 파일이라면 아마 시계가 놓인 선반 바로 밑 칸 바닥에 놓여있을 걸세.”
1분쯤 지나서 다시 존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있어요! 찾았어요, 경감님! 지금 곧 갖다드릴게요.”
“고맙네, 존. 그럼 부탁하겠네.”
“…그런데 셜록이 파일을 여기 두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레스트레이드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람이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 것처럼 셜록도 작은 1인용 플랫에서 2인용 플랫으로 이사 가서 동거인을 들였다고 해도 습관이 달라지지는 않는 법이다. 존이 셜록의 집에 들어온 이후부터 전처럼 자주 찾아가지는 못했지만 너무도 셜록답게 어질러진 거실을 보며 레스트레이드는 애써 웃음을 참곤 했다.
“그건 말일세, 존.”
셜록과 함께 살겠다고 나선 이 무모한 남자는 아직 셜록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리고 셜록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은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레스트레이드는 존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살짝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비밀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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