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나다 홈즈를 보고 있으면 어머낫! 할 정도로 다정한 감정표현이 나올 때가 있다.
심심하면 나오는 마이 디어 홈즈/왓슨이 그러하고
군인 출신에 기본 모럴이 그나마 높은 왓슨이 홈즈의 부탁으론 주저없이 위법행위를 할 때가 그러하고
그런 왓슨에게 고마워하고 걱정하는 홈즈의 모습이 나올 때가 그러하다.
자주 나오진 않지만 그렇게 스스럼 없는 표현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선덕선덕한 건 어쩔 수 없어! >ㅅ<
얼룩끈은 어렸을 때 읽었던 홈즈 에피소드 중에 제일 기분 나쁘고 섬뜩했던 이야기였는데
그때 너무 어렸을때 봐서 그랬는지 나이 들어 다시 보니까 참 훈훈하고 좋구나 :D
그라나다에 두근거리는 장면이 나와서 원작 다시 읽고 BBC버전으로 치환해서 썼다.
그 지하실은 낡은 건물의 반 지하에 위치했다. 어둡고 습기차고 어딘가에서 시궁쥐의 시체가 썩는 듯한 냄새도 났지만 셜록은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다고 했다. 그 지하실에서 거리 쪽으로 난 작은 창문이 맞은 편 아파트 1층과 정확히 마주보고 있어서 잠복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위치였던 것이다. 불행히도.
셜록과 존은 특이한 사건을 수사 중이었다. 어디가 특이하냐면 먼저 의뢰인이 특이하다고 하겠다. 셜록의 홈피를 보고 연락한 의뢰인은 헬렌 스토너. 예전엔 해롤드 스토너라고 불렸던 트랜스젠더였다. 그녀는 키가 크고 블리치가 들어간 긴 갈색머리를 가졌으며 남자의 흔적이 아직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우아한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존은 221b로 찾아온 그녀의 겁에 질린 얼굴을 보자마자 의자로 안내하고 자신과 셜록의 티타임을 위해 끓여두었던 커피를 권했다. 존의 친절에 감동한 헬렌은 잠시 손수건으로 입술을 누르더니 곧 침착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어머니의 재혼, 분노관리가 안 되는 양아버지, 어머니의 죽음, 독립하기 전까지 아버지에게 맡겨진 막대한 유산, 결혼을 앞둔 누나의 죽음, 양아버지의 간섭, 가출, 성전환, 프러포즈, 이사, 한밤중에 걸려오기 시작한 이상한 전화….
헬렌의 이야기를 다 들은 존은 살짝 셜록의 표정을 살폈다. 물론 존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비극적인 상황을 깊이 동정했다. 법적으로 성별을 바꾼 헬렌은 다음 달에 사랑하는 이와 식을 올릴 예정이었으나 이대로 가다간 식이 제대로 치러지기나 할지 미지수였다. 허나 존의 동정심과는 별개로 그녀의 이야기에서 셜록의 흥미를 끌만한 요소는 그리 많지 않았다. 굳이 미스터리의 부스러기라도 찾자면 2년 전에 의문사한 헬렌의 누나 줄리아의 사인이 조금 수상할까, 헬렌 본인은 그저 자동응답기에 몇 번 남겨진 이상한 소리를 들었을 뿐이다. 경찰에 찾아가 봤지만 스토킹 행위로도 인정해주지 않아서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이야기를 들으면서 존은 셜록이 언제 인내심의 바닥을 드러내고 이 불행한 의뢰인을 내쫓을지 조마조마했다. 그는 그녀의 처지를 안타깝게 여겼기에 셜록이 조금이라도 흥미라도 보인다면 의뢰를 받아들이도록 애써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셜록은 비웃지도 비아냥거리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의뢰를 받아들였다. 그것이 두 번째로 특이한 점이었다. 대체 셜록은 그녀에게서 어떤 흥미를 느끼고 의뢰를 받아들인 걸까?
존은 먼지투성이 창문 아래 나무 상자 위에 걸터앉아서 밖을 내다보고 있는 셜록을 힐끔 쳐다보았다. 셜록은 미동도 없이 두 손을 턱 밑에 모으고 헬렌의 창문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아직 저녁 해가 남아있는 창밖에서 햇살이 스며들어와 셜록의 하얀 자기 같은 얼굴을 짙은 꿀빛으로 물들였다. 위층인 펍에선 하루 일을 마친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어 맥주를 마시며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를 들으니 존도 시원한 생맥주를 들이켜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겐 미지근해진 생수병 하나 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셜록이 미리 충고하지 않았다면 가져오지 않았으리라. 닝닝한 생수로 목을 축인 존은 병을 셜록에게 내밀며 답답한 침묵을 깼다.
“전화가 온 건 새벽이랬지?”
셜록은 창밖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정확하게는 새벽 3시.”
“헬렌의 양아버지가 그 전화를 걸었을까?”
“전화국의 기록으로는 아니었어. 하지만 자기 이름으로 등록된 전화로 협박 전화를 걸 만큼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해. 내 추리가 맞다면 헬렌 스토너의 양부는 꽤 머리가 좋은 자야. 2년 전 줄리아의 의문사도 양부의 짓이 분명해. 그가 어떻게 범행을 저질렀는지는 오늘밤 알게 되겠지.”
언제나 그러하듯 혼잣말처럼 음성으로 머릿속을 정리한 셜록은 문득 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그가 병을 내밀고 있는 걸 보고 손을 뻗자 존은 정확한 힘 조절로 생수병을 던져주었다. 도드라진 목울대가 오르내리며 반쯤 남은 생수병의 물이 꿀꺽꿀꺽 줄어들었다. 다시 존에게 병을 던져준 셜록은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오늘 자네와 함께 온 걸 후회하고 있어. 이번 건은 위험해질 요소가 명백히 존재하거든.”
셜록의 입에서 후회란 단어가 나올 줄 몰랐던 존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 전에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문자로 꼬실 땐 언제고?”
“그땐 자네가 나 때문에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몰랐으니까.”
셜록은 살짝 눈을 내리깔고 생수병을 들고 있는 존의 손등을 응시했다. 그곳엔 손의 신경을 완전히 잘라낼 뻔한 커다란 폭탄 파편을 뽑아낸 흉터가 흉하게 남아있었다. 존은 병원에서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이 셜록의 충혈된 푸른 눈동자였다는 걸 기억했다.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었는데도 셜록은 자지 않고 존이 눈을 뜨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중에 간호사에게 들은 말로는 두 사람이 수영장 폭파 현장에서 병원으로 호송됐을 때 셜록은 치료에 필요한 마취를 거부했고 존이 눈을 뜰 때까지 한숨도 자지 않았다고 했다. 다행히 손의 신경은 무사했지만 셜록은 존이 퇴원한 후에도 손등의 흉터를 볼 때마다 아주 짧은 숨을 삼키곤 했다.
존은 셜록의 시선이 닿아있는 손을 천천히 잠바 속으로 넣었다. 허리 뒤춤엔 전장에서 자신을 든든하게 지켜주었던 묵직한 P226 권총이 꽂혀 있었다. 제대해서 민간인이 된지 꽤 되었어도 손가락에 감겨드는 권총의 감촉은 언제나 전장을 떠올리게 했다. 모두가 자신을 필요로 하고, 자신 또한 필요한 사람이었던 피 묻은 열사의 땅. 그 굉음과 열기에 길들여졌던 존은 런던의 냉하고 습한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을 때 자신의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셜록 홈즈를 만나기 전까지.
“내가 함께 하는 게 도움이 되겠어?”
담담한 존의 질문에 셜록은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가 곧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지.”
“그렇다면 기꺼이 함께 하겠어.”
아무도 필요로 하지 않았던 자신을 필요하다고 말해준 그를 지키기 위해서.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쥐똥 굴러다니는 더러운 지하실이 아닌 좀 더 깨끗하고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곳이었으면 좋겠지만 말이야.”
다만 그 말과 마음이 순도 높은 진심이라 하더라도 제풀에 간지러워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존이 겸연쩍음을 무마하기 위해 너스레를 부리자 셜록도 천연덕스럽게 맞받아쳐 주었다.
“쥐똥은 그렇다 치고 맥주를 마시면 이뇨작용이 활발해져서 곤란해.”
“맞다. 우리 화장실은 어떻게 할 거야? 펍의 화장실을 쓸 건가?”
“존, 내가 왜 생수병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생각하지?”
“……….”
농담인지 진담인지 알쏭달쏭한 셜록의 말에 존은 들고 있던 물병을 슬며시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다소 창백해진 존의 얼굴을 보고 셜록의 입가에 그려진 주름이 점점 웃음의 모양으로 깊어졌다. 냉랭한 비웃음엔 익숙해도 그의 따스한 미소는 몇 번을 봐도 쑥스러워진다. 셜록이 자신의 붉어진 얼굴을 발견하기 전에 화제를 바꾸기 위해서 존은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셜록, 그런데 스토너양의 의뢰는 왜 받아들인 거야? 그녀에게서 내가 못 본 다른 것들이라도 본 건가?”
“헬렌 스토너에게서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있는 자네를 보았지.”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존의 물음에 셜록은 개구진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별거 아냐. 그저 자네가 도와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그 매력적인 브루넷 미인이 무사히 결혼해서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수 있도록 나도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야.”
헬렌 스토너가 트렌스젠더가 된 이유는 그라나다 볼때 자세도 곧고 얼굴도 잘생긴 언니가 목소리까지 낮아서 좀 설렜기 때문이다ㅋㅋㅋ
사실 혼자 싱나서 해롤드가 헬렌이 되어 약혼자를 만나기까지의 인생역정도 몇문단에 걸쳐서 써놨다가 전체 분위기랑 안 맞아서 다 들어냄 ;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