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아.”
자신의 말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존은 베이커가 221B의 낯선 침대인데도 불구하고 꿀 같은 잠에 빠져들고 있었다. 따뜻한 잠의 샘에 두 발을 담그고 허리까지 넣고 목 끝까지 차오른 물속에 막 머리를 담그려는 찰나, 띠링! 하는 전자음이 존의 머리끄덩이를 붙잡았다. 서서히 가라앉던 몸이 멈칫하고 흐려지던 정신이 스윽 맑아졌다. 안 돼. 난 자고 싶다고. 그러나 무정하게도 다시 띠링! 하고 존의 의식을 물 밖으로 끄집어내는 소리가 울렸다. 달콤한 잠속에 뛰어들기 직전이었던 존은 잔뜩 인상을 쓰며 눈을 떴다. 옆에 둔 핸드폰에서 푸른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셜록이었다.
‘자요?’
메시지 수신 시각은 2:45am.
이 몰상식한 동거인을 어쩌면 좋을까.
존은 두 번째 메시지를 확인했다.
‘거실로 내려와요. 안 잔다면.’
아니, 나는 잘 거야. 이렇게 편히 잠든 게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고.
존은 핸드폰 액정을 바닥으로 뒤집어놓고 다시 베개에 머리를 파묻었다. 그때 악마 같은 세 번째 전자음이 띠링! 하고 울렸다.
‘안자는 거 알아요. 내려와요.’
한참 액정을 노려보던 존은 가벼운 욕설을 중얼거리며 덮고 있던 시트를 열어젖혔다.
거실로 내려 가보니 셜록이 소파에 앉아있었다. 하늘색 가운에 가벼운 실내복 차림의 셜록은 검은 코트차림보다 더 어려보이고 가늘어보였다. 아직 반쯤 감겨있는 눈을 슥슥 비빈 존은 어정어정 걸어가서 셜록의 앞에 섰다. 잠이 매달려있는 존의 얼굴을 보고 셜록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내가 깨웠어요?”
“알면서 왜 물어.”
“아직 짐도 제대로 안 옮긴 낯선 집에서 잘도 자는군요.”
“말했잖아.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고. 그리고 군에 있다 보면 아무데서나 잘 자게 돼.”
모처럼의 단잠을 방해받은 기분을 그대로 드러내듯 존의 말투는 낮보다 무뚝뚝했다. 그러나 셜록은 사과대신 살짝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부럽군요.”
존은 거의 선명해진 눈을 깜빡이며 셜록을 내려다보았다. 추리할 땐 방해된다고 밥도 제대로 안 먹는 셜록이다. 오늘 택시 운전수 사건을 해결하고 존과 함께 중국음식을 먹긴 했지만 꼬챙이처럼 꼬치꼬치 마른 손목과 목덜미를 보면 그가 평소에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는다는 건 천재 탐정이 아니라도 쉽게 유추할 수 있다. 불규칙한 식사에 따라붙는 단짝은 불규칙적인 수면. 역시 그건가? 존은 조금 풀어진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혹시 불면증이야?”
하지만 셜록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불면증은 잠을 자고 싶어도 자지 못하는 병이니까 나에겐 해당되지 않아요. 내 증세는 잠을 잘 필요성을 못 느끼는 수면장애에 가깝다고 할 수 있지요. 정신이 맑고 얼마든지 더 사고할 수 있는데 잠을 자는 건 시간낭비죠.”
“아무튼 잠을 못 잔다는 거네.”
못 자는 게 아니라 안 자는 거라고 정정하려던 셜록은 물끄러미 바라보는 존의 눈빛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드레날린 때문이에요. 사건을 해결한 날은 넘치는 아드레날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서서 좀처럼 수면을 취하기 힘들어요.”
“그리고 오늘은 생명의 위협까지 받았고 눈앞에서 사람이 죽는 걸 보기도 했지. 정신적인 충격도 무시하지 못할 거야.”
“왜 다들 내가 충격 받았을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군요. 쓸데없이 어깨에 담요나 덮어주고 괜찮냐고 묻기도 하고. 내가 괜찮다는 건 보면 모르겠어요?”
하지만 넌 지금 혼자 잠들지 못하고 자는 나를 깨우면서까지 곁에 불렀잖아.
그 말을 가까스로 도로 삼킨 존은 셜록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스프링 소리가 끼익하고 났지만 앉는 감촉은 제법 안락했다. 존이 옆에 와 앉자 셜록은 어리둥절한 눈으로 존을 바라보았다.
놀라긴. 자던 사람을 일부러 깨워서 불러들였으면서 이 정도도 기대하지 않았던 거야?
존은 소파 팔걸이에 걸려있던 무릎 담요를 펼쳐서 셜록과 자신의 무릎에 덮고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댔다. 셜록은 여전히 꼿꼿이 등을 세운 채 존을 바라보고 있었다.
“양은 세 봤어?”
존의 뻔하디뻔한 질문에 셜록은 대번에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그래야하죠? 그리고 단순한 유아수준의 반복계산으로는 내 두뇌활동을 둔화시킬 수 없어요.”
“따뜻한 우유나 핫초콜릿은?”
“우유는 다 떨어졌고 단건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런 건 왜 묻는 거죠? 나는 자고 싶지 않다니까요.”
미간에 살짝 짜증을 새기며 되묻는 셜록을 바라보며 존은 속으로 혀를 찼다.
이봐, 잠이 안 온다고 날 부른 건 너라고.
네가 뭣 때문에 자던 날 깨웠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존은 옆에서 입을 삐죽 내밀고 있는 셜록에게 어린아이 타이르듯이 말했다.
“내가 자고 싶어서 그래. 네가 자야 나도 방해받지 않고 푹 잘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평소에 예민해진 신경을 가라앉히는 방법 같은 건 없어?”
“코카…….”
“약물 말고!”
존이 그건 생각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손을 뻗어서 셜록의 머리칼을 흐트러뜨리자 셜록이 놀란 듯이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뒤로 뺐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잘난 척만 하던 그가 이렇게 놀란 표정을 지은 것은 처음 보았다. 그 표정에 왠지 장난기가 일어난 존은 셜록의 작은 머리통을 두 손으로 움켜쥐고서 마구 비비고 헝클어뜨렸다. Don't하고 짧은 소리를 지른 셜록은 도리질을 하며 뒤로 도망갔지만 남자 둘만 앉아도 빠듯한 작은 소파에서 더 도망칠 곳은 없었다. 의자 팔걸이에 등이 부딪쳐서 멈칫한 셜록을 존이 소파 쿠션 위에 쓰러뜨리고 버둥거리는 몸 위로 체중을 실었다. 셜록의 복슬복슬한 검은 머리칼 사이에 손가락을 넣어서 마음껏 뒤섞고 헝클어뜨리자 몸부림치던 셜록의 몸이 갑자기 축 늘어져버렸다.
“셜록?”
불현듯 걱정이 된 존이 손을 떼고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러자 까치집처럼 마구 흐트러진 검은 덤불 밑에서 잔뜩 토라진 얼굴이 존을 흘겨보고 있었다.
“다 끝났어요? 그렇다면 어서 비켜요. 무겁다고요.”
정색을 하면서 삐진 셜록의 얼굴을 본 존은 그가 이런 종류의 스킨십에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형도 있으면서 이런 장난을 한 번도 당해보지 않은 걸까? 하긴 오늘 만난 그의 형님이 이렇게 강아지들이 서로 물고 까부는 것 같은 장난을 할 것 같지는 않다. 군대에서 지내면서 남자들끼리의 과격한 투닥거림에 익숙했던 존은 그렇지 않은 셜록에게 이런 장난을 친 것이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존은 사과의 의미로 엉망이 된 셜록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미안. 네가 같은 캠프의 동료가 아니란 걸 잊고 있었어.”
“현실 적응 좀 하시죠. 여긴 아프가니스탄이 아니라 런던. 난 같은 캠프의 병사가 아니라 당신의 플랫메이트라고요.”
셜록은 불쾌한 듯 얼굴을 찌푸리면서 쏘아붙였지만 헝클어진 머리칼을 풀어주는 존의 손길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엉킨 머리칼 사이에 작지만 단단한 손가락을 넣고 한 올 한 올 풀어주는 존의 손길이 불쾌한건 아닌 모양이었다. 이마에 내려온 머리칼을 쓸어 올려줬을 때 셜록이 살짝 눈을 가늘게 뜨는 것을 보고 존은 그가 난폭한 장난은 싫어해도 부드러운 터치는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아이고, 이 오냐오냐 자란 도련님 같으니라고.
좋아, 기왕 이렇게 된 거 내가 특별히 서비스 해주지.
존은 셜록의 몸에 완전히 체중을 싣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셜록의 머리칼을 어루만지던 손을 목덜미로 미끄러뜨렸다. 아니나 다를까 셜록의 목덜미 근육은 단단히 굳어있었다. 어깨 재활 훈련을 할 때 배운 마사지식으로 승모근을 꽉 움켜쥐자 아팠는지 셜록이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곧 근육의 결대로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주물러주자 찡그린 미간이 펴지고 경직된 입가가 이완되었다.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기분 좋아, 셜록?”
“…별로.”
얼굴에 기분 좋다고 다 써있는데도 애써 인정하지 않으려는 셜록이 얄미워졌다. 존은 목덜미 근육에서 가장 효과적인 압점을 집고 꽉 눌렀다. 그러자 셜록이 눈을 꼭 감아버리면서 ‘아….’ 하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그 소리가 마치 고양이가 고롱거리는 소리 같아서 존은 속으로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미안, 아팠어?”
“………별로.”
“그럼 계속해?”
“…당신이 계속 하고 싶다면.”
존의 손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자 셜록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며 몸을 편히 늘어뜨렸다. 긴 다리가 소파에 다 들어가지 않아서 한쪽은 밖으로 삐져나갔지만 딱히 불편해 보이진 않았다. 존은 셜록의 표정 변화를 관찰하면서 슬슬 풀어지기 시작한 목덜미와 두피, 어깨를 조물조물 주무르고 마사지해주었다. 셜록의 피부는 존보다 얇고 서늘해서 손끝에 와 닿는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얼마나 계속했을까. 이마에 땀이 배고 힘주어 꾹꾹 누르던 손가락이 저려올 때쯤, 존은 셜록의 표정에서 변화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존의 손길에 따라 미간을 찌푸리기도, 기분 좋게 입 끝을 치켜 올리기도 했던 셜록의 얼굴에는 고요한 평온만이 떠올라 있었다. 존은 셜록의 목덜미에서 손을 떼고 나지막이 불러보았다.
“셜록?”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조용히 가라앉은 숨소리뿐이었다.
“자는구나.”
존은 셜록이 깨지 않도록 입속으로 중얼거리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눈을 감고 있으니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도 차가워보이지도 않았다. 기분 좋게 잠든 탓인지 살짝 입을 벌리고 자는 그의 표정은 순해 보이기까지 했다. 하루 종일 그 난리를 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잠이 안 온다고 자던 사람 불러내서 귀찮게 굴던 녀석이 이렇게 순진한 얼굴로 잠들다니 이건 반칙이야. 조금 심술이 난 존은 셜록의 높은 코끝을 두 손가락으로 집고 지그시 눌렀다. 그러나 코가 막힌 줄도 모르고 쿨쿨 자던 셜록은 호흡이 힘들어지자 잠결에 미간을 찡그리며 입으로 숨을 컥 들이켰다. 찔끔 놀란 존이 손을 떼고 셜록의 안색을 살폈지만 셜록은 다시 편안한 숨소리를 내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수면장애라고? 잘만 자잖아….”
존은 어이없는 눈으로 셜록을 내려다보았다. 사건을 해결한 날은 잠을 못 잔다던 그의 말은 자신을 놀리기 위한 허풍이었을까? 아니면 그도 이제야 찾은 것일지도 모른다. 네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다섯 번째로 셜록의 목숨을 위협하던 택시 운전수를 주저 없이 쏘아 맞췄을 때, 손아귀에서 짜릿하게 퍼지던 반가움과 해방감처럼. 홀로 침대에 몸을 누이고 잠 못 이루며 뒤척이거나 겨우 잠들어서도 악몽을 꾸다 식은땀에 흠씬 젖어서 벌떡 일어나던 자신을 아기 양처럼 잠들게 해준 무언가를.
…그것이 목 마사지는 아닌 것 같지만.
존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스프링이 삐걱거렸지만 셜록은 좀처럼 깨지 않았다. 투닥거리느라 바닥에 떨어진 무릎담요를 집어든 존은 셜록의 몸에 잘 덮어 주었다.
“Sweet dream, Sherlock.”
담요 위로 셜록의 어깨를 다독여준 존은 발소리를 죽여서 조심스럽게 거실을 나왔다. 셜록의 잠든 얼굴을 보고 있었더니 다시 잠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이대로 잠들면 꿈도 꾸지 않고 달게 잘 수 있을 것 같다. 존은 하품을 하면서 침실로 올라갔다. 썰렁해진 시트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눈을 감자마자 따뜻한 잠의 샘이 다시 존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존은 아래층 소파에서 곤히 자고 있는 정신 나간 천재처럼 곧 깊이 잠들었다.
그때 셜록을 잠들게 한 것이 무엇인지 존이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젯밤에 잠이 안와서 끄적거렸던 글.
뒷부분이 마음에 안들어서 조금 고쳤다. :Q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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