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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스트레이드 X 셜록 19금 단편집 [Sentimental Education]
A5 출력본 / 154P / 컬러표지 / 19금 / 7000원
셜록과 존은 뒤따라 내려가기 전에 잠깐 레스트레이드의 부서에 들르기로 했다. 그가 아직 점심을 먹으러 나가지 않았다면 함께 들자고 할 생각이었다.
셜록과 레스트레이드가 몇 년 전부터 사적인 관계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존은 두 사람 사이에 끼는 것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았다. 커플 사이에 끼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셜록이 혼자 레스트레이드를 찾아가서 점심 데이트를 신청할 만큼 살가운 성격이 아니란 것도 알고 있었다. 붙임성이 심각하게 부족한 친구를 위해서 점심 한 끼 정도는 희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디저트를 먹을 쯤엔 나와야겠다. 그건 서로가 맡은 사건 때문에 한동안 만나지 못한 두 사람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자기 위장의 안녕과 정신건강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런데 레스트레이드의 부서에 들어서자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공기가 두 사람을 맞이했다. 점심시간이라 한가할 줄 알았던 사무실엔 사람이 꽤 남아있었다. 갑자기 사건이라도 일어나서 모두 호출된 걸까. 그렇기엔 사람들의 얼굴에 긴박함이 부족하다. 사무실 분위기는 어딘가 들떠있었고 사람들은 머리를 맞대고 저마다 한 마디씩 수군대고 있었다. 레스트레이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책상에 걸터앉아서 옆 자리 사람과 뭔가 토론을 벌이고 있던 도노반 경사가 그들을 보더니 ‘프릭freak!’ 하고 외쳤다.
“마침 잘 왔어! 닥터 왓슨도 어서 와요.”
순간 존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셜록도 의외라는 듯이 희미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녀가 셜록을 이토록 반갑게 맞이한 적은 없었다. 심지어 존보다 먼저 셜록에게 인사를 하다니. 다른 사람도 아닌 도노반 경사가. 이건 분명 보통 일이 아니다. 존은 셜록과 함께 그녀의 자리로 다가가서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도노반 경사님? 무슨 일 있어요?”
그러자 도노반은 새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슨 일이 있냐고요? 보면 몰라요? 당연히 있죠. 아주 놀랄 만한 일이 생겼다고요!”
평소의 샐리 도노반 경사는 성격이 침착하고 셜록과 기세 좋게 언쟁을 벌일 정도로 배짱 있는 여성이었다. 그런데 지금 두 사람의 눈앞에 있는 그녀는 살짝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그녀뿐만 아니라 사무실에 남아있는 경찰국의 관록 있는 수사관들도 모두 상당히 흥분해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삼삼오오 짝을 지어 뭔가를 토론했고 짝을 짓지 않은 사람은 전화에 대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째선지 검시의인 앤더슨이 사무실로 올라와서 감식키트를 들고 설치는 중이었다. 이 안에서 범죄라도 일어난 건가? 레스트레이드 경감님은 어디 있는 걸까? 머리가 어지러워진 존은 도노반에게 재차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경감님은 어디 계세요?”
“경감님은 나가셨어요. 점심 드시러.”
일단 멀쩡하게 점심을 먹으러 갔다는 레스트레이드에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 것 같다. 존은 긴장을 누그러뜨리며 말했다.
“이런, 우리가 늦었군요. 점심 아직이면 같이 나가서 들자고 하려던 참이었는데.”
하지만 도노반은 긴장이든 뭐든 누그러뜨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지금 닥터와 프릭이 점심을 먹고 말고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자기도 모르게 언성을 높여버린 그녀는 최소한으로 미안해하며 말을 이었다.
“미안해요. 나쁜 뜻은 없어요. 나도 점심은 아직 못 먹었어요. 그렇지만 지금 경감님이 데이트하러 나가셨다고요. 그것도 무지무지 예쁘고 젊은 여자랑!”
(중략)
셜록은 거실에 있었다. 반만 열어둔 커튼 사이로 늦은 오후의 햇살이 비쳐드는 거실의 1인용 소파에 앉아서 뭔가를 읽고 있었다.
여기까지 차를 달려오는 내내 생각했었다. 셜록의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어떻게 말해야 그가 이 어이없는 해프닝을 웃어넘길지 열심히 생각했었다. 그러나 셜록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 순간, 머릿속에 머물러 있다가 혀끝으로 내려와서 맴돌던 모든 말들이 물처럼 녹아서 입안에서 사라져버렸다. 불안과 초조로 움츠러들어서 묵직하게 가라앉아있던 마음이 그를 보자마자 무거운 족쇄를 벗어던지고 단숨에 위로 위로 날아올랐다. 레스트레이드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2주 만의 셜록이었다.
얼굴이 조금 상해 보인다. 또 먹지도 자지도 않고 뇌세포를 혹사시켰을 테지. 그는 마른 몸에 비해 체력이 좋은 편이었지만 사건에 몰두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난 후에 수척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금 그를 안으면 아마 갈비뼈가 배길 것이다.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의 가슴을 누르는 그의 앙상한 뼈와 마디마디의 감촉이 그리웠다.
올라오는 소리를 들었을 텐데도 셜록은 잠자코 몇 페이지를 더 읽고 난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입구에 우두커니 서있는 레스트레이드를 응시한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존은 나갔습니까?”
2주 만에 나눈 대화의 첫마디였다.
“방금 입구에서 마주쳤네.”
“오늘은 진료소 야간 근무가 있는 날입니다. 내게 말하지 않았지만 야근은 사라와 함께 하겠죠. 오랜만에 여가 시간이 생겼는데 바로 야근을 하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을 테니까요.”
셜록은 희미하게 입꼬리를 치켜 올렸다.
“그런데 오늘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야근’은 다음으로 미루자고 전화를 걸더군요. 나를 집에 두고 혼자 사라를 만나러 가기 미안했나 봅니다. 다시 보내느라 애먹었어요. 존은 오늘 꽤 화가 난 것 같더군요.”
셜록의 어조는 평탄했고 표정도 여느 때와 같았다. 심술궂게 빈정거리거나 쌀쌀맞게 무시할 거라고 예상했던 레스트레이드는 그의 태연한 태도에 당황하고 말았다.
“그럼 자네는? 화가 나지 않았나?”
“화가 날 이유가 없는데 화를 낼 필요는 없죠.”
셜록은 살짝 어깨를 으쓱해보이고서 소파에서 일어났다. 읽던 책을 탁자 위에 올려놓은 그는 레스트레이드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지나쳐서 주방으로 들어갔다.
“차 한 잔 들겠습니까?”
등 뒤에서 찬장 문이 열리고 머그컵끼리 스치고 가스불이 켜지는 매우 평화로운 일상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차는 나보다 존이 더 잘 끓이는데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아니었나봅니다. 차 한 잔 달라고 했더니 지금 한가롭게 차나 마시고 있을 때냐고 나한테까지 화를 냈어요.”
셜록의 말끝에 쿡쿡 웃는 소리가 섞여들었다.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한 그 작은 웃음소리에 둥실 날아올랐던 레스트레이드의 마음은 순식간에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왜 화를 안 내는 거야.”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말이 입술을 비집고 불쑥 튀어 나왔다. 레스트레이드는 차를 끓이고 있는 셜록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내가 다른 여자랑 데이트하러 나갔다고 들었잖아. 존마저도 저렇게 화를 내는데 자네는 화도 안 내는 건가?”
얼굴을 보자마자, 그에게 목소리를 전할 수 있는 거리에 들어서자마자 당장 해명해서 오해를 풀려고 했었다. 아니야, 셜록. 난 자네를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어. 믿어주게.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심술궂게 빈정거리면 묵묵히 들어줄 생각이었다. 속에 쌓인 것들이 다 쏟아져 나올 때까지, 그래서 그의 마음이 후련하게 비워질 때까지 어떠한 독설이든 다 들어주려고 했다. 만일 쌀쌀맞게 무시한다면, 자신을 없는 사람처럼 자기 삶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마냥 무시한다면 그가 지칠 때까지 곁에 달라붙어 있으려 했다. 무시한다는 건 적어도 그 존재를 의식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셜록이 자신을 돌아봐줄 때까지, 돌아보고 자신의 말에 귀 기울여줄 때까지 끈기 있게 기다릴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가 도노반의 말처럼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누구를 만나도 화를 안 내고 바람을 피워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자 레스트레이드의 가슴 속에서 뭔가가 툭 터져나왔다.
“스토킹, 도촬, 기물파손, 협박에 상해까지! 이건 심각한 범죄야, 셜록! 그 미친놈이 네가 혼자 있을 때 문을 부수고 들어오면 어떡할 거야? 이미 한 번 손을 댔는데 두 번은 못 댈 것 같아? 그놈이 널 해칠 거라고!”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화가 끓어올랐다.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해온 키만 큰 어린애가 한 달이 다 되도록 괴롭힘을 당해온 사실을 몰랐다는 자괴감 때문일까. 시체와 증거, 독약과 흉기 같은 것엔 의도가 순수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집착하면서 정작 자기 일엔 그 반에 반만큼도 신경 안 쓰는 셜록이 답답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아니면 그저 셜록이 다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화가 난 레스트레이드의 손아귀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강인한 다섯 개의 손가락이 손목을 파고들자 셜록은 미간을 찡그리며 쏘아붙였다.
“놔요! 성한 왼손마저 못 쓰게 만들 셈입니까?”
그 말에 움찔 놀란 레스트레이드는 불에 덴 것처럼 황급히 손을 놓았다. 그의 손이 쥐고 있던 자리엔 하얀 피부 위로 선명한 손자국이 올라오고 있었다. 셜록은 아픈 듯 붙잡혔던 자리를 슬슬 어루만졌다. 한쪽은 서툴게 감아둔 붕대, 한 쪽은 벌건 손자국이 남은 셜록의 두 손을 바라보며 레스트레이드는 시무룩하게 사과했다.
“미안….”
“미안한 줄 알면 이만 돌아가 주시죠. 이미 내 시간을 충분히 뺏었으니까요. 지금 돌아가면 내 우편물을 허락 없이 뜯어본 것과 현관문을 부수고 들어온 건 용서하죠.”
“이봐, 문은 처음부터 부서져 있었다고.”
“문에는 ‘구멍만’ 뚫려 있었습니다. 문을 잠그고 여닫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고요. 충분히 기능하는 문을 부숴서 못쓰게 만든 건 당신이에요. 야드로 문 수리비를 청구하지 않는 걸 다행으로 아시죠.”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좀처럼 봐줄 기색이 없이 따박따박 몰아붙이는 셜록 앞에서 레스트레이드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고뇌에 빠졌다. 더 이상 추궁해봤자 셜록은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내버려두고 돌아갈 수는 없다. 자신이 부수고 들어온 문은 경첩까지 떨어져 나가서 더 이상 문이라고 부를 수 없는 대형 쓰레기로 화했다. 바깥에선 셜록을 도촬하고 협박하고 상처를 입힌 소름 끼치는 스토커가 침입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왕성한 호기심에 비해 생존본능이 월등히 함량미달인 그를 이 집에 내버려두고 갔다간 어떤 흉흉한 기사가 내일자 신문을 장식하게 될지 모른다. 골치가 아파진 레스트레이드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거실 입구에 삐딱하게 서서 빨리 가라고 눈치를 주고 있는 셜록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우리 집에 가겠나?”
레스트레이드x셜록x레스트레이드 19금 AU [Between the Glassbox]
※ 커플링 주의 ※
셜록X레스트레이드와 레스트레이드X셜록이 공존하는 19금 리버시블입니다. 씬 나옵니다. 취향타는 소재도 나옵니다. 마존 설정 있음.
A5 출력본 / 182P / 컬러표지 / 19금 / 8000원
sample 1
남자들이 둘러싸고 있는 것은 샤워부스보다 조금 큰 크기의 유리 상자였다. 유리 상자를 둘러싼 남자들은 무대를 구경하는 사람들처럼 환호하거나 박수를 치지 않았다. 그들은 말없이 침을 삼키며 집중하고 있을 뿐이었다. 저 안에 뭐가 있기에 저렇게 열심히들 보고 있나. 궁금해진 레스트레이드는 남자들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들이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는 상자 안엔 검은 머리의 청년이 들어 있었다.
청년은 2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풍성한 검은 웨이브 헤어에 창백할 만큼 하얀 피부. 적절하게 잔 근육이 잡힌 마른 몸엔 딱 붙는 가죽바지와 가죽조끼를 걸치고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징 박힌 가죽부츠, 역시 팔꿈치까지 올라오는 검은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액세서리는 길고 날씬한 목에 찬 은제 초커 하나가 다였다. 신체가 노출된 부분이 가슴과 배, 팔꿈치 위쪽밖에 없었지만 하얀 피부와 검은 에나멜의 대비가 다 벗은 것보다 더 에로틱하게 보였다. 보아하니 청년은 유리 상자 속에서 춤을 추며 스트립쇼를 하는 모양이었다. 상자 위엔 디지털시계가 붙어있었는데 커다란 액정에서 숫자가 막 10에서 9로 바뀐 참이었다. 저 숫자가 0이 되면 돈을 넣어야하는 시스템인 것 같았다.
청년은 무대 위의 바니걸들처럼 웃으며 애교를 떨지도, 봉춤을 추는 근육남들처럼 육체미를 과시하지도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턱을 도도하게 치켜든 채 유리벽에 기대어 선 그는 한쪽 가죽장갑의 가운데 손끝을 깨물었다. 하얀 앞니를 살짝 드러낸 채로 팔을 당기자 팔꿈치까지 감싼 긴 가죽장갑이 천천히 벗겨졌다. 애태우듯 천천히 벗겨지는 장갑과 그 밑에서 드러나는 희고 긴 팔과 손목을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진 레스트레이드는 빽빽이 서있는 남자들 사이로 파고들었다. 장갑을 다 벗겨낸 청년은 무심한 표정으로 손님들을 둘러보다가 장갑을 홱 내던졌다. 청년이 던진 장갑은 마침 원의 제일 앞줄로 나온 레스트레이드 바로 앞에 있는 유리벽에 맞고 떨어졌다. 흠칫 놀란 레스트레이드와 청년의 눈이 마주쳤다. 청년의 눈동자는 겨울날의 하늘보다 더 차가운 아이스블루였다. 자신을 쏘아보는 청년의 서늘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레스트레이드는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가 찬 손으로 심장을 꽉 움켜쥔 기분이었다. 청년은 넋 나간 표정으로 바라보는 레스트레이드가 우스웠는지 피식 웃어주었다. 청년의 눈가가 살풋 가늘어지면서 색이 연한 입술에 웃음기가 떠오르자 레스트레이드는 차가운 손에 쥐어진 심장이 물처럼 스르르 녹아서 없어져버리는 것 같았다.
청년이 느릿느릿 장갑을 다 벗고 가죽부츠도 벗고 맨발이 되었을 때, 상자의 시계가 00:00이 되었다. 그러자 애초에 그리 밝지도 않았던 상자의 불이 꺼지며 청년의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남자들이 큰 소리로 불평하는 소리에 넋을 잃고 있던 레스트레이드도 정신이 들었다. 다시 불을 켜라고 안달하는 손님들에게 마릴린 먼로 같은 차림의 여장남자가 와서 초반 10분은 서비스로 보여주고 그 다음부터는 돈을 낸 손님에게만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투덜거리는 손님들 중에서 지갑을 주섬주섬 꺼내려는 남자가 보이자 레스트레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택시비로 꺼냈던 돈을 유리 상자의 돈 창구에 재빨리 쑤셔 넣었다. 그가 오늘 밤 청년의 첫 번째 손님이 된 것이다.
sample 2
뒷문으로 끌려 나간 레스트레이드는 어두운 골목에서 흠씬 두들겨 맞았다. 원래 몸싸움에 익숙한 타입도 아닌데다 잘 먹지도 못하고 폐인처럼 지낸 중년의 레스트레이드가 젊고 건장한 경호원들과 맞서 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레스트레이드의 바다보다도 깊은 분노는 안젤로의 바디 블로를 정통으로 맞고 물거품처럼 사그라졌다. 솥뚜껑 같이 거대한 주먹이 뱃속을 뚫고 들어와서 내장을 후려치는데 분노 그딴 것이 무슨 대수란 말인가. 그때 눈앞에 하얘졌는지 까매졌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려보니 땅바닥에 웅크려서 달팽이처럼 몸을 동글게 말고 몰매를 맞고 있었다. 너무 아파서 잘못했다고 그만하라고 아프다는 말조차 나오지 않았다. 늘씬하게 두들겨 맞은 레스트레이드는 뒷골목 쓰레기 더미 위에 아무렇게나 버려졌다. 그에게 침을 탁 뱉은 안젤로는 또 난동을 부리면 그땐 이 정도로 넘어가지 않을 거라고 으름장을 놓고 사라졌다. 레스트레이드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쓰레기 더미 위에 쓰레기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온몸이 아프고 자존심도 아팠다. 번듯한 회사에서 한 부서를 이끌던 자신이, 멀쩡한 가정을 가지고 넓은 집에 살며 좋은 차를 굴리던 자신이 이렇게 비참하게 몰락해서 냄새나는 쓰레기 더미 위에 쓰러져 있는 것이다. 이 쓰레기 더미는 몰락한 자신의 종착역이었다. 더 떨어져봤자 여기보다 더 비참할까. 이 더러운 밑바닥으로 떨어지면서까지 원한 것은 오직 셜록뿐이었는데 그를 만져본 적도, 목소리를 들어본 적도 없었다. 자신은 그저 그를 구경하며 욕정을 채우는 손님 중 하나일 뿐이다. 이제는 돈이 없어서 그것조차 못하게 되겠지만. 그렇게 생각하자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너무나도 부끄럽고 비참해져서 울음이 나왔다.
엉망이 된 얼굴로 꺽꺽대며 우는 그의 앞에 길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레스트레이드는 누가 곁에 다가왔다는 걸 알아도 상관하지 않았다. 우는 쓰레기나 안 우는 쓰레기나 어차피 똑같은 쓰레기. 이 한심한 꼬락서니를 해가지고 억지로 안 우는 척 해봤자 세워질 체면도 남아있지 않았다.
서글프게 이어지는 레스트레이드의 흐느낌 위로 건조한 저음이 내려앉았다.
“왜 울지?”
어딘가 묘한 울림이 있는 목소리였다. 레스트레이드는 부어오른 눈을 겨우 뜨고 자기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무 아파서 이젠 헛것이 보이는 모양이다. 긴 코트를 걸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은 바로 셜록이었다. 본디지가 아닌 멀쩡한 옷을 입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 캐시미어 코트와 짙은 색 머플러를 두른 셜록은 유흥업소에서 스트립쇼를 하는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우아하고 기품이 있었다. 레스트레이드는 자신이 환상을 보는 것이 아닐까 눈을 의심하며 멍하게 셜록을 올려다보았다. 셜록이 다시 물었다.
“왜 우냐고 묻잖아, 아저씨.”
어쩐지 높고 투명할 것이라는 막연한 상상과는 달리, 진짜 셜록의 목소리는 놀랍도록 깊은 울림이 있는 저음이었다. 음역이 낮은데도 저음 특유의 묵직한 느낌은 없고 대신 세련된 발음과 깊이가 있었다.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도 레스트레이드는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셜록의 물음에 대답하고 있었다.
“내 자신이 비참해서요. 난 이제 더 떨어질 곳도 없어요….”
그 말에 웃는 소리가 들렸다. 셜록이 레스트레이드를 내려다보며 입 끝을 치켜 올리고 피식 웃고 있었다. 그 미소는 상자 안에서 다정하게 지어주던 미소와는 달리 몹시 차가웠다. 레스트레이드는 처음 셜록을 봤을 때처럼 찬 손이 심장을 움켜쥐는 듯한 기분을 다시 맛봤다. 입가에서 웃음을 지운 셜록은 레스트레이드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랑 가겠어?”
레스트레이드는 얼떨떨한 얼굴로 셜록을 쳐다보았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셜록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고 있었다. 유리벽 너머가 아니라 실제로 닿을 수 있는 거리에서. 이게 꿈이라면 깨지 말아야지. 그리고 이게 현실이라면…. 레스트레이드는 피 묻은 손으로 셜록의 손을 덥석 움켜쥐었다. 셜록은 손에 피와 오물이 묻는 것도 개의치 않고 레스트레이드를 일으켜 주었다. 몸을 일으켰더니 온몸이 비명을 지르고 다리가 휘청거렸다. 레스트레이드는 제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셜록에게 의지한 채 한참을 윽윽거리며 신음해야 했다. 그의 등이 어느 정도 펴지자 셜록은 손을 잡아끌고 성큼성큼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친 사람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는 보폭과 속도에 레스트레이드는 발을 질질 끌며 필사적으로 따라갔다.
“그런데 어디로 가는 겁니까?”
조심스러운 질문에 셜록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당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곳.”
셜록x존x셜록 [Lost in Neverland]
A5 / 83P/ 컬러표지 / 5000원 / 전연령 (매진 임박 ^^;)
눈을 뜬 곳은 하얀 공간이었다. 창밖에선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흘러내리는 물방울로 가득한 유리창이 하얀 천장과 벽에 부연 회색의 물결무늬를 찍어냈다. 셜록은 초점이 잘 맞지 않는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손끝부터 발끝까지 꼼짝도 할 수 없었고 움직이지 않는 것은 멍한 머릿속의 두뇌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은 뻑뻑한 눈을 깜빡이는 속도만큼이나 느리게 흘러갔다. 사고의 톱니바퀴는 무거운 눈꺼풀을 여섯 번 움직였을 때 겨우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가 누워있는 곳은 병원이었다.
백지에 점이 찍히자 생각이 느리게나마 그어져나갔다. 이전의 그가 머릿속에서 한꺼번에 찍어내던 복잡한 미궁의 입체 설계도가 아닌 서툴고 삐뚤삐뚤한 한 줄의 선이었다. 병실에 누워있다는 건 어딘가 다쳤다는 뜻이다. 입원을 해야 할 만큼 큰 부상. 교통사고? 아니다. 그곳에 차는 없었다. 총상. 그래, 총이 있었다. 한 개의 권총과 다수의 라이플. 울린 총성은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천지가 무너지는 듯한 굉음. 웃음소리. 광기에 찬 고소. 강하게 떠밀린 충격. 온몸을 감싼 물과 허리에 단단하게 감겨있던 팔.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의 눈빛. 웃음. 땀에 젖은 손가락이 방아쇠를 쥐어짜는 감촉. 그가 말했다. “괜찮아?”
셜록은 눈을 크게 뜨고 숨을 들이키려 했다.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있었던 것 같이 숨이 막혔다. 그러나 그의 코에 이어진 튜브는 일정량의 산소만을 공급할 뿐이었다. 팔은 다행히 움직였다. 코에서 산소튜브를 떼어낸 그는 정말로 오랜만에 자력으로 폐안에 공기를 채워 넣었다. 가득 삼킨 공기에선 눅눅한 습기와 소독약 냄새가 났다.
힘들게 몸을 베개 위로 조금 밀어 올렸을 때, 간호사가 병실로 들어왔다. 눈을 뜨고 미약하지만 몸을 움직이고 있는 그를 발견한 간호사는 갑자기 틀린 그림 찾기에 몰입한 사람처럼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았다. 그녀가 정답을 찾아낼 때까지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던 셜록은 바싹 마른 입술을 열어서 말했다.
“나………같이……려 온………람…어딨…….”
입술이 움직여도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성대는 군데군데 빠트린 단어를 바람소리로 대신했다. 셜록의 불완전한 말은 그녀의 뇌에 전해지지는 않았어도 멍해진 주의를 환기시키는 계기는 되어준 모양이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간호사가 달려와서 그의 맥을 짚어보았다. 맥이 뛰지 않는 인간이 말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는데도. 셜록의 동공에 불빛을 비춰본 간호사는 침대 머리맡의 벨을 누르고 밖으로 급히 뛰어나갔다.
“어서 닥터를 불러와요! 1895실 환자가 깨어났어요!”
다시 돌아온 간호사에게 물었다. 그녀와 함께 온 신입 간호사에게도 물었다. 한걸음 늦게 커피와 양파 냄새를 풍기며 달려온 의사에게도 물었다. 말을 하면 할수록 온전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으나 셜록의 질문에 대답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와 같이 실려 온 사람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처음으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온 아는 얼굴은 의외로 레스트라드 경감이었다. 입구에서부터 뛰어오진 않았어도 꽤 걸음을 재촉했는지 숨이 턱밑에 차있었다.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들어온 그는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는 셜록을 보고 잠시 눈썹을 늘어뜨렸다가 곧 다시 미간에 주름을 새겼다. 셜록은 그가 세 번째로 들어올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었다.
“자네가 깨어났다는 연락을 받고 바로 달려왔네. 무슨 늦잠을 그렇게 오래 잔 겐가? 다들 걱정했다구.”
말투는 친근했지만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셜록은 5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를 꼼꼼히 관찰했다.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레스트라드는 그의 사무실에서 힉맨 미술관 관장 웬세슬라스를 심문하고 있었다. 바로 어제 일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셜록을 바라보고 있는 레스트라드는 어제보다 많이 지쳐보였다. 수면부족으로 빨갛게 충혈된 눈, 눈가의 주름과 흰 머리가 늘어났고 체중도 4파운드는 빠져보였다. 가슴께에 오늘의 점심메뉴였을 치킨 케밥 소스가 묻어있는 하얀 셔츠는 사흘은 갈아입지 않은 듯했다. 시간이, 흐른 것이다. 예상했던 것보다 많이. 셜록은 힘이 들어가지 않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서 베개에 등을 기댔다. 레스트라드가 도와주려 했지만 그의 손은 빌리지 않았다.
“얼마나……지난 겁니까. 한 달?”
“석 달. 정확히는 석 달하고 12일이 지났지.”
3개월 12일. 그로부터 104일이 지났다. 아무것도 모른 채 식물인간이라는 말 그대로 길바닥에 널브러진 야채처럼 병실에 누워서 104일이라는 시간을 낭비한 것이다. 셜록은 뒷머리가 뜨끔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수영장에서….”
목에 힘을 주자 마른기침이 터져 나왔다. 셜록은 고개를 숙이고 기침 때문에 튀어 오르는 몸을 베개에 억눌렀다. ‘수영장’이라는 단어를 알아들은 레스트라드는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겨우 기침이 멎었을 때 그가 대답했다.
“미안하네. 모리아티는 잡지 못했어. 수영장 폭파 현장에서 그가 고용한 저격수들의 시신은 찾았지만 모리아티의 시신은 없었네. 우린 그가 아직 살아있다고 보고 있어. 지금은 인터폴과 공조해서 국내외로 모리아티의 흔적을 찾고 있네.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서 자네가 이야기해준다면 수사에 큰 도움이 될 거야. 물론 몸이 좀 더 회복된 후에 말일세.”
시신.
일부러 뇌리에서 밀어두었던 단어가 귓가에 들이닥쳤다. 눈을 뜨고 엉킨 실타래에서 기억의 실을 하나씩 뽑아냈을 때부터 그가 어디 있냐는 질문에 간호사와 의사들이 모르쇠로 일관했을 때와 급한 발걸음으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이 그가 아닌 레스트라드라는 것을 발소리만 듣고 알아차렸을 때, 머릿속에 떠올렸다가 억지로 밀어낸 단어였다. 그가 이곳에 없는 이유, 레스트라드가 그의 이름조차 말하지 않는 이유, 자신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해주지 않는 이유. 셜록은 기계 같은 어조로 중얼거렸다.
“존은 죽었군요.”
말은 생각보다 쉽게 흘러나왔다. 매일 같이 쏟아낸 평범한 추리 중 하나처럼. 사실 그렇게 어려운 추리도 아니지 않은가. 아직 원활하게 돌지 않는 뇌로도 금방 도출해낼 수 있는 추론이었다.
“내가 눈뜬 지 2시간 가까이 지난 지금까지 존은 여기 오지 않았습니다.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마이크로프트 다음으로 받았을 텐데도 말이죠. 아무도 그가 어디 있는지 말해주지 않았고 이 병실엔 존이 다녀간 흔적조차 없어요. 존이 나처럼 다쳐서 입원했고 아직 혼수상태라도 당신이라면 내게 말해줬을 텐데 철저하게 언급하지 않는 걸 보니 그의 이름은 내 앞에서 금구라는 말이겠죠. 내가 흥분할까봐 마이크로프트가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그의 말은 무시해요, 레스트라드. 당신보다 한 시간은 먼저 왔으면서 이 방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있는 겁쟁이니까. 내 걱정은 필요 없으니 질문에나 대답해요. 존은 죽었습니까?”
레스트라드의 얼굴에 당혹감이 스쳐지나갔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셜록, 난 자네가….”
“존이 죽었냐고요!!!”
버럭 소리를 지르자 뜨끔하게 쑤셔오던 뒷머리의 통증이 두개골 안쪽으로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귀에서 웅 소리가 나면서 안구가 하얗게 시렸다. 고통스럽게 이마를 짚은 셜록은 부릅뜬 눈으로 레스트라드를 쏘아보았다. 셜록의 앞에서 레스트라드는 정말로 난처한 기색이었다.
“자네가 말하는 존이 혹시 폭파현장에 같이 있던 사람인가? 안타깝지만 현장에서 발견된 생존자는 자네 한 사람 뿐이야.”
지끈거리는 이마를 움켜쥐고 있던 셜록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예요, 경감? 존 말입니다. 존 왓슨. 모리아티가 존을 납치했었단 말입니다. 폭탄이 터질 때 같이 있었는데 아직까지 그것도 모르고 있었단 말입니까?”
뭔가, 말이 되지 않는다. 셜록은 어이가 없다는 투로 말하면서도 여러 군데에서 아귀가 맞지 않는 것을 느꼈다. 런던 경찰이 아무리 무능할지라도 폭파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와 함께 살던 사람의 동향을 파악하지 않았을 리가 없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닌 레스트라드가 다른 사람도 아닌 존의 소식을 모른다는 건….
뇌가 너무나도 느리게 굴러갔다. 조바심이 난 셜록은 두통을 참으며 굼뜬 두뇌를 채찍질 했다. 생각해. 생각하라고. 네가 잘하는 건 그것뿐이잖아. 그러나 셜록이 모서리가 잡힌 답을 찾아내기 전에 레스트라드가 황망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셜록. 난 존 왓슨이란 사람이 누군지 몰라. 전에 만난 적이 있는 사람인가?”
겨우 계단을 내려오자 거실에 마이크로프트가 서있었다. 석 달 만에 본 그는 옷만 가벼운 재질의 양복으로 바뀌었을 뿐 며칠 전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셜록은 모든 것이 바뀌어버린 이 세계에서 하나라도 변함없는 것이 남아있다는 사실에 예상치 못한 반가움을 느꼈다. 비록 그것이 마이크로프트라고 할지라도.
“도망을 치려거든 좀 더 찾기 어려운 곳으로 가지 그랬니.”
삐걱이는 발소리에 돌아본 마이크로프트가 매끄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빈말이라도 살가운 인사나 걱정의 말은 없었다. 그가 몸은 좀 어떠냐고 물어봤다면 오히려 놀랐을 것이다. 눈앞에 서있는 남자는 셜록이 어릴 적부터 알아온 마이크로프트였다.
“…형이 한 짓이지.”
마이크로프트가 석 달만의 인사말을 생략했듯이 셜록도 본론부터 들어갔다.
“인정할게, 마이크로프트. 영국 정보부를 주무르는 거물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황당한 사기극을 감쪽같이 칠 수 있을 줄은 몰랐어. 레스트라드의 연기가 그럴 듯해서 잠깐이었지만 거의 믿을 뻔 했잖아. 대체 그 사람에게 뭐라고 협박한 거지? 연금이라도 몰수하겠다고 했어? 게다가 집안 물건들과 먼지까지 세팅해놓다니 쓸데없이 완벽주의자답군. 이러면 내가 정말로 믿을 줄 알았어?”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구나.”
“난 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거야.”
마이크로프트는 말없이 동생을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엔 셜록이 잘 알고 있는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어린 셜록이 밖에서 사고를 치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 대신 그를 맞이하던 마이크로프트의 얼굴에서 자주 보았던 표정이었다.
“존 왓슨 말이냐. 모리아티에게 납치되어서 함께 수영장에 있었다던?”
“그래, 존. 존은 지금 어디 있지? 어째서 존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는 거야?”
마이크로프트의 입에서 존의 이름이 흘러나오자 가슴이 조여드는 것 같았다. 그날 수영장에서 폭탄 잠바를 입은 존을 발견한 순간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그가 어째서 여기 있는지 이성적으로 생각하기보다 먼저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지나간 감정들. 다시는 겪고 싶지 않은 그 여러 감정들엔 불쾌감이라는 하나의 이름표만 붙여두었다. 셜록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려 나왔다.
“…존은 죽었어?”
그러자 마이크로프트는 가감 없이 슬픈 표정을 지었다.
“셜록, 넌 수영장 전체가 날아간 폭발 현장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폭발 직후에 물속으로 뛰어들어서 목숨은 겨우 부지했지만 부상이 심했어. 병원으로 실려 오는 도중에 심박정지가 일어나서 넌 3분 15초 동안 숨이 멎었었다. 4분이 넘었다면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존이 죽었냐고 물었어.”
“가장 심각한 손상 부위는 머리였다. 폭탄에서 나온 금속파편이 측두엽 안쪽에 박혀 있었지. 이 나라의 내로라하는 뇌과의들도 뇌손상 없이 파편을 제거하는 건 불가능하다고 했어. 난 그들과 싸웠고 독일에서 불러온 뇌신경전문의에게 집도를 맡겼다. 그리고 넌 3개월 동안 깨어나지 못했어.”
“존이 죽었다고 울고 난리치지 않을 테니까 사실대로 말해, 마이크로프트!”
소리를 치자 지끈거리던 관자놀이가 안쪽으로 쿡쿡 쑤시기 시작했다. 마이크로프트는 셜록의 일그러진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대답했다.
“존 왓슨은 죽지 않았다, 셜록.”
“하….”
참고 있던 숨이 단숨에 흘러나왔다. 존이라면 아마도 그것을 안도의 한숨이라 부를 것이다. 무거운 몸을 지탱하고 있던 긴장이 풀리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아무데나 앉고 싶었다. 셜록의 시선이 무심코 거실 안의 소파로 향했을 때, 마이크로프트가 덧붙였다.
“존재하지도 않는 사람이 죽을 수는 없어.”
천천히 눈을 깜빡인 셜록은 마이크로프트에게 시선을 돌렸다. 지금까지 들어본 마이크로프트의 말 중에 가장 어리석고 어이없는 말이었다. 욱신거리는 관자놀이에 날카로운 꼬챙이가 푹 찔러들어온 것 같은 통증이 더해졌다.
“뭐………?”
셜록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한 마디라도 더 하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마이크로프트가 말을 이었다.
“말 그대로란다. 네가 수영장에서 함께 있었다고 주장하는 존 왓슨은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한 넌 존 왓슨이라는 사람과 만난 적이 없어. 넌 올해 1월에 이 집으로 이사를 왔고 3월 말에 수영장 폭파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혼자 살았다. 그리고 조수도 대리인도 두지 않고 혼자 일했어. 생각해보렴. 네가 만들어서 이름붙인 자문탐정이라는 직업에 동업자가 있을 리가 없잖니.”
마이크로프트의 목소리가 동굴처럼 웅웅 울리며 커졌다 작아졌다 했다. 관자놀이를 쑤셔대던 두통이 머리 전체로 퍼지고 속이 울렁거렸다. 셜록은 자꾸 한쪽으로 기울어지려는 몸을 문틀에 기댔다.
“형…도……존을…알잖아………이틀 전에도……이 의자에 앉……아서……존이 소파에서……잤다고…….”
띄엄띄엄 중얼거리는 셜록은 이성으로 인식하고 있던 지난 3개월의 시간관념이 머릿속에서 엉켜버렸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했다. 머리가 뜨겁게 부풀어 올라서 터질 것만 같았고 눈앞에서 검은 점과 하얀 점들이 어지럽게 번쩍였다. 마이크로프트는 문틀을 짚고도 비틀거리는 동생에게 손을 내밀었으나 셜록은 미약하게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쳤다. 손을 거둬들인 마이크로프트가 냉정하게 말했다.
“네가 하는 말은 모두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은 일들이다. 난 존 왓슨을 만난 적이 없고 너도 마찬가지야. 나뿐만 아니라 레스트라드 경감, 허드슨 부인도 모두 그를 모른다. 존은 셜록 네가 머릿속에서 만들어낸 인물이야.”
셜록은 더 참지 못하고 문지방에 토해버렸다.
그날 밤 셜록은 존의 얼굴을 그렸다. 존과 함께 게임 삼아서 간단한 캐리커처는 그리곤 했지만 제대로 된 데생은 오랜만이었다. 셜록은 집에 있는 빈 종이란 빈 종이는 다 가져와서 거실 바닥에 늘어놓았다. 서랍 속에서 찾아낸 연필은 끝이 뭉툭하고 반 토막이 나있었다. 크고 작은 종이로 패치워크된 하얀 거실바닥에 앉은 그는 가까이 놓인 종이부터 집어 들고 기억 속에 남아있는 존의 얼굴로 한 장씩 메워나갔다. 존의 동그란 얼굴, 깊은 눈과 고집스러운 입매, 놀라거나 어이없을 때마다 힘주어 밀어 올리던 이마의 주름, 본인은 굉장히 신경 쓰지만 실은 전날 밤 어느 쪽으로 누워서 잤느냐의 차이밖에 보이지 않는 머리 모양, 그의 짧고 보드라운 더티 블론드. 곱슬머리의 음영을 넣고 있는 손끝에 그의 머리칼 속을 헤집었던 촉감이 되살아났다.
한 장 한 장 그려나갈수록 그의 여러 얼굴들이 떠올랐다. 그의 웃는 얼굴, 그의 화난 얼굴, 그의 잠든 얼굴, 마이크로프트와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을 보고 철 좀 들라며 혀를 차던 얼굴, 허드슨 부인을 바라보며 누군가를 생각하던 얼굴, 시답잖은 농담에 눈을 꼭 감고 키들거리는 얼굴, 화내기 직전인 레스트라드를 달래며 대신 미안해하던 얼굴, 그가 나를 바라보는 얼굴, 그의 미소, 존, 그리운 존의 얼굴….
그러나 수십 장을 그려도 마음에 드는 그림이 나오지 않았다. 어떤 건 너무 괴팍하게 그려졌고 이건 어떤 건 너무 유약하게 그려졌다. 어떤 건 너무 회의적으로 보였고 어떤 건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였다. 열이 내렸어도 연필을 쥐고 있는 손가락은 아직 미덥지 못하게 떨렸다. 하얀 종이 위에 그려진 낯선 얼굴이 하나씩 늘어갈 때마다 구겨버리려고 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오직 머릿속에서만 볼 수 있었던 존의 얼굴을, 비록 똑같지 않을지라도 구겨버릴 수는 없었다. 셜록은 자꾸 떨리는 손가락을 쥐었다 폈다하며 존의 얼굴을 그리고 또 그렸다.
새벽이 되자 종이가 떨어졌다. 거실 바닥은 온통 어딘가 한 군데 만족스럽지 못한 존의 얼굴로 뒤덮여 있었다. 셜록은 흑연이 새까맣게 묻은 손가락으로 종이더미 안에서 한 장을 집어 들었다. 종이 안의 존은 약간 어색한 듯이 입 끝을 치켜들고 웃고 있었다. 완벽하진 않아도 어색해하면서 싱긋 웃는 느낌이 기억 속의 존과 가장 닮은 그림이었다. 커튼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새벽빛에 존의 얼굴을 한참 비춰본 셜록은 첫 차가 다니는 시간에 맞춰서 노숙자 네트워크의 연락책을 호출했다. 그로부터 2시간 후, 런던 사람들은 출근길의 전철역에서, 러시아워로 막혀있는 차도의 육교 위에서, 식료품점 뒷문과 극장 포스터 게시판에서, 불량아들이 모여드는 뒷골목과 무료급식소 앞에 가득 나붙은 존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DO YOU KNOW THIS MAN? DR. JOHN WATSON.]
연락할 번호와 함께 존의 얼굴이 피카딜리 서커스의 모든 네온사인 간판을 점령한 것은 그날 오후 7시경이었다.
(중략~)
셜록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차창을 열었다. 차를 오래 탄 것도 아닌데 멀미가 나려고 했다.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후로 세반고리반이 약해져 있었다. 택시는 진료소 한 블록 앞에서 신호에 걸려서 서있었다. 길가를 걸어가는 사람들을 무심히 바라보던 셜록의 시야 끄트머리에 익숙한 형상이 스쳐지나갔다. 다음 순간, 셜록은 차도 한가운데에서 차문을 열어젖히고 뛰어나가고 있었다.
“이봐! 차비는?!”
택시기사의 성난 외침소리와 함께 빵빵거리는 클랙션 소리가 사방에서 울렸다. 신호는 파란 불로 바뀌어서 차도엔 차들이 달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셜록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차들도 아랑곳 않고 오직 한 곳만을 바라보며 달려 나갔다.
존.
존이었다. 인파에 섞여서 골목으로 들어간 실루엣은 분명히 존의 뒷모습이었다. 동그란 머리통에 작지만 곧은 등, 빛에 따라 짙은 블론드로도 옅은 브루넷으로도 보이는 그의 짧은 머리칼. 얼핏 스쳐지나갔지만 알아볼 수 있다.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그의 모습을 알아보지 못 할리가 없다. 존이 저기 있다. 살아서 다리도 절지 않고 무사히 도로를 걷고 있다. 존이, 지금 눈앞에 있었다. 셜록은 존과 자신 사이를 막아선 사람들을 밀치고 정신없이 뛰어가며 외쳤다.
“존!!!”
존이 들어간 골목으로 뛰어든 순간, 강한 힘이 셜록의 뒷덜미를 뒤로 잡아당겼다. 앞으로 달려 나가는 힘과 뒤에서 당기는 힘이 상충하면서 균형을 잃은 셜록은 벽으로 넘어졌다. 반사적으로 팔을 내밀어서 멈추려고 했지만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이 놓아주지 않고 그의 몸을 벽에다 메쳤다. 셜록은 돌 벽에 옆머리를 호되게 부딪치고 바닥에 쓰러졌다. 90도로 뒤집힌 흐릿한 시야의 끝에서 그리운 실루엣이 사라지고 있었다.
“존……….”
눈을 한번 깜빡였을 뿐인데 눈앞에 둥그렇게 원을 그리고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였다. 전부 낯선 얼굴들이었다. 몽롱한 눈으로 그들을 쳐다보던 셜록은 자신이 찾던 얼굴이 그 안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벌떡 몸을 일으켰다.
“존!”
그러나 누워있던 길바닥에서 등이 채 떨어지기 전에 두개골이 갈라지는 듯한 통증이 머리를 덮쳤다. 셜록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관자놀이를 손바닥으로 짚었다. 요즘은 일상이 되어버린 짤막짤막한 어지럼증과는 비교가 안될 만큼 강렬한 현기증이 아픈 머릿속을 들쑤셨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감아버린 눈꺼풀 아래에서 흰빛과 검은빛이 차례로 명멸하며 춤을 추었다. 흑백으로 그려진 동그란 뒷머리가, 서두르는 발뒤꿈치가 어두운 시야 구석에서 사그라졌다. 셜록은 동물처럼 신음하면서 땅을 짚고 다시 몸을 일으키려 했다.
“……기다…려………거기 서……존……….”
“움직이지 말아요. 그대로 누워 있으세요. 여기 좀 도와주세요!”
느리고 구부러진 목소리와 함께 단호한 두 개의 힘이 셜록의 양어깨를 바닥에 내리 눌렀다. 뿌리치고 일어나려고 버둥거렸으나 그를 붙잡는 힘이 네 개로 늘어나 무게를 실어왔다. 사지가 붙잡힌 그는 길바닥에 고정된 무력한 표본이었다. 셜록은 존이 사라진 골목 쪽으로 고개를 내밀고 절망적으로 몸부림쳤다.
“이거 놔! 놓으라고!”
그러나 팔다리를 결박하는 힘은 사라지지 않고 부드러운 손길이 그의 머리를 감싸고 바로 눕혔다. 빙글빙글 어지럽게 돌아가는 회색 하늘을 등지고 하얀 얼굴이 천천히 다가왔다.
“진정하세요. 머리를 세게 부딪치셨어요. 잠깐 이대로 누워 있으셔야해요.”
여전히 느리고 멍멍하게 울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쓰다듬었다. 발버둥을 멈춘 셜록은 망연하게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놀란 아이처럼 벌어진 입에서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사라….”
그러자 능숙한 손놀림으로 셜록의 맥을 재고 있던 그녀가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연한 푸른빛 눈동자에 희미한 호기심이 맺혔다.
“절 아시나요?”
눈앞에서 흥미로운 기색으로 살짝 미소 짓고 있는 여자는 사라 소이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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